Orbit
-
-
잘 자, 내일 아침에도 나는 여기 있을 거니까.Orbit 2026. 7. 25. 03:23
서이현이 소개팅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별것 없는 오후였다. 대대 본부 복도 끝 자판기가 또 동전을 먹었다느니, 다음 주 사격 일정이 하루 밀릴 수도 있다느니 하는 시시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누군가 정 소위 이번 주말에 소개팅 나간다던데, 하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상대가 공군이라더라며 한마디를 얹었다. 누구도 특별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적당한 나이의 미혼 여자가 주말에 사람 하나 만나는 일이 군대라고 해서 사건이 될 이유는 없었다. 서이현 역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가한가 보네.” 하고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 한마디는 제법 그럴듯하게 무심했다. 주위 사람들도 웃었고 이야기는 곧 다른 데로 넘어갔다.문제..
-
버리지 않은 것 (인형 후편)Orbit 2026. 7. 24. 23:36
밤이 깊었다. 부대 건물의 복도는 이미 오래전 인기척이 끊겼고, 멀리서 간간이 터지는 당직사관의 무전 소리만이 정적을 얇게 긁었다. 스텔라는 보고서 파일을 가슴팍에 단단히 끌어안은 채 서이현의 관사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려 들어 올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며칠째 이어진 야근 탓인지, 사적인 공간에 상관을 찾아왔다는 긴장 탓인지는 본인도 구분하지 못했다. 세 번쯤 짧게 노크하자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관사 안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서이현의 얼굴을 절반쯤 드러냈다. 그는 편한 반팔과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샤워를 막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와 있었고, 평소보다 풀어진 차림과 달리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다만 흰자위가 조금 붉었다. 그 역시 또..
-
인형Orbit 2026. 7. 24. 19:55
그날은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적어도 스텔라가 검은 인형 하나를 내밀기 전까지는 그랬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배드바츠마루 인형이었다. 검은 몸통에 삐죽 솟은 머리털, 노란 부리와 심술궂게 치켜뜬 눈. 며칠 전부터 서이현의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피로를 보고 고른 것이었다. 요즘 잠을 잘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잠이 안 올 때 이런 거라도 껴안고 있으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려고 오는 내내 몇 번이나 문장을 다듬었는데, 막상 그의 책상 앞에 서자 입에서 나온 것은 훨씬 단순한 말이었다. “대위님 닮아서 샀습니다.” 서이현은 인형을 받아 들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검은 덩어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손가락 끝으로 턱 아래를 툭 건드리자 인형의 고개가 까딱 올라갔..
-
다음엔 그러지 마. 네가 잘못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나는 아직 네가 내게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네가 없어지는 것부터 먼저 상상하게 만들지는 마.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야. 살아 돌아와줘서 다행이라고.Orbit 2026. 7. 24. 10:19
훈련 중 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받은 순간부터 서이현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위험 구역 안에 인원이 남아 있다는 것, 그 인원을 빼내기 위해 정스텔라 소위가 상부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진입했다는 것.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온 보고는 그것뿐이었다. 현장에서는 계속해서 짧은 교신이 오갔다. 인원 확인, 장비 통제, 진입 금지선 재설정. 평소의 서이현이라면 그 모든 정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정리했을 것이다. 사고의 원인을 추리고, 책임 범위를 나누고, 다음 지시를 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귀에는 분명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오는데, 머릿속에는 단 한 문장만 남았다. 정스텔라가 아직 안 나왔다.그 사실이 다른 모든 판단을 밀어냈다. ..
-
아직 나를 모르는 너에게Orbit 2026. 7. 23. 18:48
서이현이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오래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떻게, 왜 과거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육군사관학교의 풍경과 아직 새것의 냄새가 나는 제복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들. 날짜를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이 칠 년 전, 정스텔라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날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학식이 한창인 연병장에는 스무 살의 생도들이 반듯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제복, 긴장으로 굳은 어깨,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젊은 얼굴들. 입학생 대표가 호명되자 한 사람이 대열을 벗어나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정스텔라.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서이현의 호흡이 멎었다. 입학생 대표 선서를 낭독하는 스텔라는 그가 알던 스물일곱의 여자가 아니었다. 볼에는 앳된..
-
임관식Orbit 2026. 7. 23. 17:13
그날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봄바람이 연병장 위 태극기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햇빛을 받은 졸업생들의 정복은 단정하게 빛났고, 군악대의 연주와 구령 소리가 넓은 대열 위를 번갈아 지나갔다. 서이현은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내빈석에 앉아 있었다. 제701보병사단 작전참모부 소속 대위. 동기들보다 빠르게 주요 보직을 거쳐 소령 진급을 앞둔 그는 사단 안에서도 장래가 확실한 엘리트로 통했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작전 계획에는 빈틈이 없었으며, 유능한 만큼 사람에게도 가혹했다. 그에게 임관식은 특별할 것 없는 공식 일정에 불과했다. 해마다 수백 명의 장교가 비슷한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긴장과 감격, 애써 감추려는 흥분. 이름과 성적만 다를 뿐 대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졸업생 대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