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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봄바람이 연병장 위 태극기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햇빛을 받은 졸업생들의 정복은 단정하게 빛났고, 군악대의 연주와 구령 소리가 넓은 대열 위를 번갈아 지나갔다. 서이현은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내빈석에 앉아 있었다. 제701보병사단 작전참모부 소속 대위. 동기들보다 빠르게 주요 보직을 거쳐 소령 진급을 앞둔 그는 사단 안에서도 장래가 확실한 엘리트로 통했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작전 계획에는 빈틈이 없었으며, 유능한 만큼 사람에게도 가혹했다.
그에게 임관식은 특별할 것 없는 공식 일정에 불과했다. 해마다 수백 명의 장교가 비슷한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긴장과 감격, 애써 감추려는 흥분. 이름과 성적만 다를 뿐 대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졸업생 대표가 호명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열을 벗어난 여자가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수위 계급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모자 아래로는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돌았고, 날카로운 눈매 아래에는 신임 장교답지 않은 평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스텔라.
수석 입학, 수석 졸업. 각종 교육 성적과 표창 기록이 빈틈없이 이어진 육사 최고의 엘리트였다. 서류로는 이미 알고 있던 이름이었다. 지나치게 완벽한 이력이라 실제로 만나면 오히려 실망하기 쉬운 종류의 사람. 그러나 선서를 시작한 스텔라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린 순간에도 말끝 하나 흐려지지 않았다. 모든 행동이 정석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낸 태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서이현의 손에서 굴러가던 볼펜이 멈췄다.
단정하고 우수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자신의 우수함을 당연한 듯 두르고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에 취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긴장한 기색을 숨기느라 애쓰지도 않았다.
저 사람은 어디에서 무너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감이라기보다는 풀어보고 싶은 문제를 발견했을 때의 감각에 가까웠다. 인간은 가까이에서 살피면 생각보다 빨리 단순해졌다. 강한 척하는 사람은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고, 성실한 사람은 인정에 굶주렸으며, 영리한 사람은 제 능력을 과신했다.
정스텔라도 과연 그럴까.
며칠 뒤, 서이현은 제701보병사단 작전참모부의 자기 자리에서 신임 장교 보직 배치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정스텔라의 이름은 명단 위쪽에 있었다. 그녀가 배치될 곳은 그의 직할 부대였고, 실무상으로도 바로 아래에서 움직이는 자리였다. 수석 졸업생을 작전 분야에서 육성하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엘리트 장교를 사단의 핵심 참모부에 두는 일 역시 이상하지 않았다. 서이현은 배치 서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임관식 날의 얼굴이 생각보다 선명하게 떠올랐다. 흔들림 없던 목소리와 곧은 시선, 낯선 상황을 두려워하기보다 먼저 파악하려 드는 듯한 표정.
첫 출근 날, 정스텔라는 정해진 시각보다 조금 일찍 작전참모부에 도착했다.
문밖에서 군화 굽이 멈추고, 잠시 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허락이 떨어지자 갓 임관한 소위가 들어와 전입 신고를 했다. 모자와 서류철을 든 손의 위치, 걸음의 간격, 책상 앞에서 멈추는 거리까지 교범처럼 정확했다. 대부분의 신임 장교는 서이현 앞에서 쉽게 경직됐다. 젊은 나이에 주요 보직을 맡은 엘리트라는 명성과, 표정 없이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습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이현은 일부러 침묵을 길게 끌었다. 그녀가 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긴장한 상태에서도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상관에게 평가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상관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거슬리면서도 흥미로웠다.
가까이 다가온 스텔라는 임관식 때보다 더 어려 보였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신임 소위답지 않게 침착했다. 서이현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지나치게 모범적이면서도 외운 말을 읊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호한 말을 건넸을 때조차 스텔라는 잠깐 눈을 깜박였을 뿐이었다. 입가에 떠오른 아주 옅은 미소는 무례하다고 하기에는 선을 지켰고, 공손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그제야 서이현은 임관식 날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자신감은 남을 얕잡아보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종류의 안정감이었다.
그런 사람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대신 한번 금이 가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무너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서이현은 책상 위의 보직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실의 작전 업무가 기록 속 성적처럼 깔끔하게 풀리지 않을 때, 상관의 지시와 자신의 판단이 충돌할 때에도 저 눈빛을 유지할 수 있을까. 스텔라는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자신이 맡은 임무를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이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한 신임 장교였다. 그러나 사람의 진짜 모습은 가장 잘 준비된 순간이 아니라,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 순간은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정스텔라가 지금처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지, 서이현은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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