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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않은 것 (인형 후편)Orbit 2026. 7. 24. 23:36
밤이 깊었다. 부대 건물의 복도는 이미 오래전 인기척이 끊겼고, 멀리서 간간이 터지는 당직사관의 무전 소리만이 정적을 얇게 긁었다. 스텔라는 보고서 파일을 가슴팍에 단단히 끌어안은 채 서이현의 관사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려 들어 올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며칠째 이어진 야근 탓인지, 사적인 공간에 상관을 찾아왔다는 긴장 탓인지는 본인도 구분하지 못했다.
세 번쯤 짧게 노크하자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관사 안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서이현의 얼굴을 절반쯤 드러냈다. 그는 편한 반팔과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샤워를 막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와 있었고, 평소보다 풀어진 차림과 달리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다만 흰자위가 조금 붉었다. 그 역시 또 잠들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뭐야, 이 시간에.”
서이현의 시선이 스텔라의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눈 아래 짙어진 그늘과 핏기 없는 입술, 제대로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그는 한심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찼지만 문을 닫지는 않았다.
“충성. 급하게 보고드려야 할 건이 있어 왔습니다. 여기…….”
“들어와. 짧게 해.”
몸을 옆으로 비키는 동작은 무심했다. 스텔라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그의 관사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내부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깔끔했다.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물건이라고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몇 장과 침대 머리맡 구석에 반쯤 처박힌 검은 인형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스텔라에게는 그걸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소파에 걸터앉아 보고서를 내밀었고, 서이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스탠드 하나만 켜진 방 안은 어중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스텔라는 허리를 펴고 앉아 있으려 애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등이 조금씩 굽었다. 고개가 앞으로 떨어질 때마다 화들짝 들어 올렸고,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가늘게 감기를 반복했다. 서이현은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입.”
스텔라가 황급히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방금 새어 나온 하품까지 명령 하나로 잘라내는 목소리였다. 서이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몇 장을 더 넘기다가 한 문단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여기. 지난 분기 대비 증감률 빠져 있어. 수치도 다시 확인해.”
“넷슴다.”
보고서를 받아 든 스텔라는 소파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대답과 달리 눈꺼풀은 이미 거의 닫혀 있었다. 서이현은 한동안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꺼지기 직전의 전구처럼 간신히 버티는 얼굴이었다. 노트북을 빌려 달라는 말까지 흐물거리며 꺼내는 꼴을 보니, 저 상태로 일을 시키면 보고서를 고치기도 전에 책상 위로 쓰러질 게 분명했다.
“됐어. 내일 해.”
“아……! 아, 넷슴다. 바로 하겠습니다. 노트북만 빌려주십셔…….”
“노트북.”
서이현은 기막히다는 듯 되뇌었다. 그러고는 보고서를 접어 책상 위에 던졌다.
“야. 듣고 있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작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서이현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앞으로 다가가자, 스텔라는 보고서 파일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고개를 떨군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한밤중에 상관의 관사까지 찾아와서는 허락도 없이 잠들어버린 부하를 내려다보며 서이현은 한참 말이 없었다.
미쳤나, 진짜.
깨워야 했다. 당장 흔들어 깨워 관사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규정상으로도, 소문을 막기 위해서도 그게 맞았다. 이 시간에 여군 소위가 남자 대위의 관사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문틈으로 한 번만 엿보아도 끝장날 그림이었다. 서이현은 그런 실수를 봐줄 만큼 관대한 상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규정과 선을 지키는 데 유난스럽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손이 가지 않았다.
며칠째 야근하는 걸 알고 있었다. 새벽까지 불이 켜진 사무실 앞을 몇 번이나 지나쳤고, 그때마다 좀 쉬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던 것도 기억했다. 상관이 부하의 몸 상태까지 일일이 챙기는 건 불필요한 간섭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완전히 방전된 채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모든 변명이 궁색해졌다. 서이현은 결국 옷장에서 담요를 꺼냈다. 거칠고 대충인 손길로 스텔라의 몸 위에 툭 던져 덮었다. 다정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고는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한 시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혼잣말이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정확히 한 시간만 재우고 깨우겠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서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그는 스텔라를 깨우지 않았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관사는 더욱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반듯하게 앉아 있던 스텔라의 몸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 소파 쿠션에 파묻혔다. 담요는 조금씩 흘러내렸고, 서이현은 그때마다 짜증스럽게 일어나 다시 끌어올렸다. 마치 자기가 이 상황을 자초한 게 아니라는 듯 매번 혀까지 찼지만, 끝내 그녀의 어깨가 드러난 채로 두지는 못했다. 세 번째로 담요를 고쳐 덮어주려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잠든 스텔라의 손이 담요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허공을 느리게 더듬던 손끝이 그의 소매에 닿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천을 느슨하게 붙잡았다. 서이현의 몸이 굳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세 풀릴 듯 약한 손아귀였다. 손을 빼려면 얼마든지 뺄 수 있었다. 그런데 스텔라는 마치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손가락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가지 마십셔.”
잠에 취한 목소리가 숨처럼 새어 나왔다.
서이현의 턱이 단단히 굳었다. 의자 등받이를 붙잡은 반대쪽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풀렸다. 잠꼬대였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무슨 꿈을 꾸는지도 모른 채 뱉은 한마디일 뿐이었다. 그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더 우스웠다.
그는 소매를 빼려 했다. 한 번. 손가락에 닿을 듯 말 듯 손을 가져갔다가 멈췄다. 두 번. 이번에는 스텔라가 미세하게 몸을 웅크리자 다시 손을 거뒀다. 세 번째쯤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규정대로라면 일으켜 세우고 돌려보내면 됐다. 절차대로, 원칙대로. 서이현이 가장 잘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씨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욕설이 입술 사이로 흘렀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평소보다 한 박자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감각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밤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스텔라는 그의 손목까지 붙잡은 채 깊이 잠들었고, 서이현은 손을 뜯어내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밤을 꼬박 새웠다. 가끔 고개를 숙여 잠든 얼굴을 살폈다. 깨어 있을 때는 늘 상관 앞에서 긴장해 있던 눈매가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그렇게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깨워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늦어졌다.
블라인드 사이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 무렵, 서이현의 인내심도 마침내 한계에 닿았다. 그는 밤새 붙잡혀 있던 손목을 조금 비틀어 빼려 했다. 스텔라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더니 오히려 더 세게 붙잡았다.
“정스텔라.”
반응이 없었다.
“소위.”
목소리를 한 톤 높였지만 고른 숨소리만 돌아왔다. 서이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옅게 돋았다.
“야. 셋 센다. 하나.”
스텔라는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고양이처럼 담요를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둘.”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서이현은 마침내 손목을 빼내고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밀었다.
“기상. 지금 당장.”
“음…….”
스텔라는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눈으로 낯선 천장을 바라보다가, 자기 몸 위에 덮인 담요와 앞에 서 있는 서이현을 차례로 확인했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졌다.
“아, 넵! 넵…….”
“설명해 봐.”
서이현은 책상에 기대 팔짱을 꼈다. 밤을 새운 얼굴은 피곤으로 거칠어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자 관사에서 아침까지 뻗어서 자 놓고 죄송합니다?”
스텔라는 구겨진 군복을 황급히 정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눌린 머리카락 한쪽이 아무리 손으로 빗어도 다시 튀어나왔다. 평소였다면 서이현의 표정만 보고도 바짝 얼었을 텐데, 지금은 잠이 덜 깬 탓인지 겁에 질린 얼굴로 꾸벅꾸벅 사과만 반복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서이현은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 점점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너 지금 상황 이해하고 있어? 새벽에 여군 소위가 대위 관사에 들어와서 소파에서 잤어. 이게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을 거 아냐.”
“죄송합니다…….”
“고개 들어.”
스텔라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서이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잔뜩 겁먹은 눈이었다. 밤새 자기 손목을 놓지 않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먼저 시선을 돌렸다.
“보고서. 수치 다시 확인해서 오늘 오전까지 갖다 놔.”
“넵.”
그걸로 끝내면 됐다. 보고서를 돌려주고, 관사 밖으로 내보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를 시작하면 됐다. 그런데 책상에서 몸을 떼려던 서이현의 발이 멈췄다. 밤새 붙잡혀 있던 손목에 아직도 미세한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텔라가 다시 굳었다.
“어젯밤에 내 손목 잡고 잔 거, 기억나?”
“넵?”
“‘가지 마십셔’ 이러면서 안 놓더라.”
서이현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말을 꺼낸 걸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스텔라의 눈이 더 크게 뜨였다.
“제가요?”
“그럼 내가 했겠냐.”
“죄, 죄송합니다.”
“잠결에 그런 거라고 하면 끝인 줄 알아?”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지만, 실제로 무엇을 따질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만 밤새 그 한마디에 붙들려 있었다는 게 억울했다. 정작 말한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때 스텔라가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발끝으로 무언가를 건드렸다. 바닥을 짧게 굴러간 검은 덩어리가 그녀의 발목 옆에 멈췄다.
“아…… 인형.”
스텔라가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검은 머리와 뾰족한 눈매, 심통 난 듯 꾹 다문 입. 자신이 얼마 전 서이현에게 선물했던 배드바츠마루였다.
“대위님이랑 닮았다”고 웃으며 내밀었던 것. 요즘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으니 껴안고 자면 잠이 잘 올 거라며, 조금은 놀리듯 건넸던 것.
스텔라는 인형과 서이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침 서이현도 꼭 인형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찰나 흔들렸다. 침대 머리맡에 있어야 할 것이 왜 소파 근처까지 굴러와 있는지 본인도 알지 못했다. 담요를 꺼내다 떨어뜨린 건지, 밤중에 소파 옆으로 가져다 놓은 건지. 어느 쪽이든 들켜서는 곤란했다.
“그게 왜.”
퉁명스러운 말이 평소보다 빠르게 튀어나왔다. 스텔라는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작게 말했다.
“버리실 줄 알았는데.”
서이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목 뒤를 한 번 긁은 뒤,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는 걸 왜 버려. 자리 차지하니까 놔둔 거지.”
인형을 일부러 소파 옆까지 가져다 놓은 사람처럼 들리기 싫어 덧붙인 변명이었지만, 말할수록 더 궁색해졌다. 스텔라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서이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웃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표정으로 했어.”
스텔라는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웃었다. 소리 내면 정말로 혼날 것 같아 어깨만 작게 들썩였다. 서이현은 그런 그녀를 노려보다가 손을 뻗어 인형을 빼앗았다.
“됐고. 그 얘기 하자는 거 아니잖아. 딴 데로 새지 마.”
“넵.”
“보고서 오전까지.”
“넵.”
스텔라는 보고서 파일을 품에 안고 관사 문 앞까지 갔다. 손잡이를 잡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서이현은 배드바츠마루를 한 손에 든 채 여전히 심통 난 얼굴로 서 있었다. 둘이 너무 닮아서, 스텔라는 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대위님.”
“왜.”
“잘 가지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빨리 나가라는 뜻이었다. 스텔라는 작게 웃으며 경례한 뒤 관사를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서이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목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누군가의 손가락이 감겨 있는 듯했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 위에 흐트러진 담요를 접었다. 그러고는 손에 든 배드바츠마루를 내려다보았다.
심술궂은 얼굴의 인형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뭘 봐.”
서이현은 인형을 다시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이전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쉽게 떨어지지 않을 자리에.
버리지 않은 것이 인형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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