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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月がきれいですね。
    Orbit 2026. 7. 31. 22:18

    서이현이 밤중에 전화를 걸어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처리할 서류가 남아 있던 것도 아니었고, 다음 날 훈련에 관해 급히 전달해야 할 지시사항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관사 침실에 누워 한 시간 가까이 천장만 바라보다가 문득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최근 통화목록의 가장 위가 아닌, 굳이 몇 칸 아래에 묻혀 있던 이름 하나를 찾아 눌렀다. 정스텔라. 연결음이 두 번을 채 넘기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오히려 먼저 당황한 쪽이 서이현이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수화기 너머로 조심스럽게 들려온 “대위님?”이라는 목소리에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 잘못 걸었다며 끊을 수도 없었다.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정스텔라 앞에서만큼은 더욱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산책이나 하자고 말했다. 명령처럼 들리지 않도록 하려 했으나, 부탁처럼 들리는 것은 더 견딜 수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말투가 되었다. 지금 나와. 잠깐 걷게. 스텔라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십오 분쯤 뒤 부대 뒤편 산책로 입구에 나타난 그녀는 급히 나온 흔적이 역력했다. 느슨하게 묶은 머리카락 끝이 아직 조금 젖어 있었고, 전투복 위에 걸친 얇은 외투의 지퍼는 반쯤 열린 채였다. 목 언저리에는 씻고 난 뒤의 비누 향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서이현은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불쾌해졌다. 자신이 그런 사소한 것까지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늦었군, 하고 괜한 트집부터 잡았다. 약속한 시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부대 뒤편으로 이어진 산책로는 평소에도 사람이 드물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고요했다. 가로등 불빛이 듬성듬성 이어진 길 위로 초여름의 밤공기가 축축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낮에 내린 소나기가 아직 마르지 않아 흙에서는 짙은 냄새가 올라왔고, 풀숲 어딘가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가 짧고 집요한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일정하지 않았다. 서이현은 평소보다 느리게 걸었고, 스텔라는 그가 늦춘 속도를 눈치챘으면서도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반 걸음 뒤를 따랐다. 계급으로 정해진 거리였다. 그러나 서이현은 오늘따라 그 반 걸음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자신이 부른 사람이면서도 곁에 오라고 말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자니 등 뒤에서 들리는 그녀의 발소리 하나하나가 신경을 긁었다. 결국 그는 별것 아닌 질문을 던지는 척 고개를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전공했다고?”

     

    스텔라는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네. 아빠랑 타협해서요.”

    서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랑 딜을 쳤다고?”

     

    콧바람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를 찔렸을 때마다 나오는 웃음이었다. 비웃음과 흥미 사이의 어딘가에 걸쳐 있는, 스텔라가 아니었다면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을 소리. 그는 걸음을 늦추며 그녀 쪽으로 반 보쯤 몸을 틀었다. “고등학생이 아버지한테 조건을 걸어? 대단하네.”

    “아빠는 제가 원래 하려던 걸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성적 유지하는 조건으로 제가 하고 싶은 걸 했죠.”

     

    “말은 그럴듯한데, 결국 네 멋대로 했다는 소리잖아.”

    “허락을 받았으니까 멋대로는 아니죠.”

    “그걸 허락하게 만든 게 너고.”

     

    대꾸는 없었지만 스텔라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서이현은 그 표정을 곁눈질로 훑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처음 임관식장에서 그녀를 봤을 때부터 그랬다. 저 자신만만한 눈빛이 거슬리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오래 들여다보면 먼저 흐트러질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자세부터 바로잡았지만 스텔라는 달랐다. 긴장하면서도 물러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생각까지 접지는 않았다. 길들이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가까이 두었다. 적어도 서이현은 그렇게 설명해 왔다. 활용 가치가 높아서, 일 처리가 정확해서, 자신이 내린 지시의 위험한 모서리를 군법과 규정 안으로 능숙하게 갈아 넣을 줄 알아서. 그 밖의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순간 이름을 붙여야 했고, 이름이 붙은 감정은 통제하기 어려워지기 마련이었다.

     

    잠시 후 그가 불쑥 물었다.

    “그래서 일본어는 잘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어조였다. 그의 검지가 주머니 안쪽에서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스텔라가 얼마나 능숙하게 대답할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다른 언어를 발음할 때 어떻게 변하는지 듣고 싶었다는 쪽이 조금 더 정확했으나, 그는 물론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건요. 지금은 예전만큼 유창하진 않지만.”

    “가르쳐 줘봐.”

     

    스텔라가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제가 대위님께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 탓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며 순간적으로 밝아진 얼굴, 군복 깃 위로 가늘게 드러난 목선, 거기서 쇄골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선이 시야에 잡혔다. 서이현은 한 박자 늦게 다시 눈을 맞추었다.

     

    “어. 해봐.”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장난이라기보다는 시험에 가까운 어조였다. 네가 얼마나 잘하나 보겠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스텔라는 그것이 그저 핑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에게 일본어가 급히 필요할 리 없었다. 일본에 갈 계획도, 일본인과 직접 대화할 일도 없었다. 서이현은 언제나 필요한 것만 익히는 사람이었고, 쓸모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경멸했다. 그런 사람이 한밤중에 자신을 불러내 산책을 하며 일본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이상한 사실이 스텔라의 가슴 한편을 간질였다.

     

    “오늘 같은 날은 이렇게 말해요.” 스텔라는 손끝으로 습기 어린 밤공기를 가볍게 휘저었다. “あたたかい。아타타카이. 따뜻하다고.”

    “아타타카이.”

     

    서이현은 곧바로 따라 했다. 발음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꽤 좋았다. 그 사실이 약간 신경을 긁었다. 모르는 것을 배우면서도 서툴러 보이는 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혀끝으로 낯선 음절을 한 번 굴려본 뒤 눈을 미세하게 좁혔다. 발음의 촉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타타카이.”

     

    한 번 더 말했다.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스텔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숨을 흘렸다. “잘하시는데요?”

     

    “이게 잘하는 거야?”

    “처음치고는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이현은 걸음을 반 박자 늦추었다가 그녀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그럼 이것도 가르쳐 줘야지.”

     

    “어떤 거요?”

    스텔라가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서이현은 그녀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척했으나, 이미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고개를 조금만 더 숙이면 머리카락에 턱이 스칠 것 같았고, 스텔라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군복 깃 안쪽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목울대까지 내려다보였다. 굳이 이만큼 다가설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서이현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을 의식한 순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언제나 명령을 받으면 침착하게 대답하고, 예기치 못한 문제 앞에서도 규정부터 찾아내는 여자가 고작 거리 하나 때문에 얼마나 흐트러지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런 것을 시험이라고 부르면 그럴듯했다. 부하의 담력을 점검하는 일, 위압적인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살피는 일.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법은 언제나 많았다.

     

    “그럼 가까운 건 뭐라고 해.”

     

    질문을 던진 뒤에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가까움이라는 단어를 배우기 위해 가까워질 필요는 없었지만, 서이현은 마치 지금의 거리가 훌륭한 시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텔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눈매에서 시작해 살짝 벌어진 입술에 머물렀다가 다시 눈으로 올라오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스텔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짧게 삼켰다.

     

    “近い。ちかい요. 치카이.”

     

    “치카이.”

     

    서이현의 입술이 낯선 발음을 느리게 따라 그렸다. 평소 군인다운 단단한 어조와 달리 혀끝에서 부드럽게 구르는 음절이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듯 침묵하다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치카이.”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정확했다. 스텔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하시는데요.”

    “그 정도는 하지.”

     

    칭찬을 받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미세하게 걸렸다. 그는 외국어 몇 음절을 제대로 발음한 것뿐인데도 평가받는 학생의 자리에 자신이 놓였다는 사실을 영 탐탁지 않아 했다. 더구나 평가하는 사람이 정스텔라라니. 자신보다 한참 어린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잘했다고 말하는 상황은 우스워야 했으나, 이상하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서이현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표정을 더욱 무뚝뚝하게 굳혔다.

     

    “이 정도면 가까운 거야?”

     

    그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군화 밑창이 젖은 흙을 누르는 소리가 작게 났다.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거리마저 줄어들자 스텔라의 뒤로 가로등 기둥이 가까워졌다. 그녀가 피하려면 옆으로 몸을 틀어야 했지만, 서이현은 그 가능성마저 미리 알고 있다는 듯 한쪽 팔을 가로등에 느슨하게 기대었다. 가둔다고 부르기에는 무심한 자세였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확했다.

    스텔라는 잠깐 그의 가슴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네. 지금은 충분히 가까운데요.”

    “충분히?”

     

    서이현이 낮게 되물었다. 목소리에는 웃음이 없었지만 눈은 아주 조금 가늘어져 있었다. 그는 스텔라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고개를 더 숙였다. 숨결이 서로의 피부에 닿을 만큼은 아니었으나, 어느 쪽이 먼저 조금만 움직이면 금세 닿아버릴 것 같은 거리였다.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닌데.”

     

    말은 가볍게 던졌지만, 그 속에는 농담보다 훨씬 묵직한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거리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것이므로 어느 한쪽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었고, 자신과 스텔라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그가 정해왔다는 오만한 선언일 수도 있었다. 스텔라는 어느 쪽인지 묻지 않았다. 물었다가는 서이현 자신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대답을 억지로 끌어내야 할 것 같았다. 대신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선생이 알려준 기준인데 학생이 말을 안 들으시면 곤란하죠.”

    “누가 학생이야.”

    “일본어 배우고 계시잖아요.”

    “내가 부탁했나. 네가 가르쳐준다며.”

    “대위님이 해보라고 하셨는데요.”

     

    서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먼저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처럼 턱 끝에 힘이 들어갔다. 스텔라는 웃음을 참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대의 모든 사람이 한마디를 듣지 않으려고 미리 몸을 사리는 남자가 고작 일본어 수업의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것이 우스웠다. 물론 그 얼굴을 보고 대놓고 웃을 만큼 겁이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서이현은 그녀의 표정을 한동안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문득 손을 들어 올렸다. 스텔라는 손이 움직이는 순간 본능적으로 어깨를 굳혔지만 피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정수리 위에 툭 얹혔다. 쓰다듬는다고 하기에는 무게가 있었고, 억누른다고 하기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파고들어 두피 가까이에 손을 고정했다. 머리의 크기를 재는 것처럼, 혹은 자신의 손안에 정확히 들어오는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 자리에 놓을 물건이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럼 작은 건.”

     

    스텔라가 눈을 깜빡였다.

     

    “네?”

    “작다. 일본어로 뭐냐고.”

     

    그의 손이 정수리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머리카락 사이를 느리게 헤집었다. 질문의 의도는 너무 뻔했지만 스텔라는 모르는 척 발음을 또박또박 알려주었다.

     

    “小さい。ちいさい. 치이사이요.”

    “치이사이.”

     

    서이현이 곧바로 따라 했다. 그러고는 방금 배운 두 단어를 머릿속에서 비교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치카이, 치이사이.”

    “네.”

    “뭐야. 비슷하잖아.”

    “안 비슷한데요.”

    “앞에 치까지 똑같잖아.”

    “그 뒤가 전혀 다르잖아요. 치카이는 가깝다, 치이사이는 작다.”

    “일부러 헷갈리게 만든 것 같은데.”

     

    마치 일본어라는 언어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듯한 말이었다. 스텔라는 결국 작게 웃음을 흘렸다. 서이현의 시선이 즉시 내려왔다.

     

    “왜 웃어.”

    “아니요. 그냥 대위님도 어려워하는 게 있구나 싶어서요.”

    “내가 언제 어렵다고 했어.”

    “방금 어렵다고 하신 것 같은데.”

    “비슷하다고 했지, 어렵다고는 안 했어.”

     

    말꼬리를 붙드는 태도가 유치할 만큼 단호했다. 그는 정수리에 올려두었던 손에 조금 힘을 주어 스텔라의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가 느슨해졌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려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스텔라는 고개가 그의 손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에도 반항하지 않았다. 대신 눈만 위로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치이사이?”

     

    서이현이 손바닥 아래의 머리를 가리키듯 말했다.

     

    “사람 머리에 쓰는 표현은 아닌데요.”

    “작은 건 맞잖아.”

    “대위님 손이 큰 거죠.”

    “결국 상대적인 거네.”

     

    그는 자신의 손과 그 아래에 놓인 스텔라의 머리를 번갈아 보았다. 손가락을 조금만 오므리면 머리 전체를 붙잡을 수 있을 듯했다. 평소에는 군모 아래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오늘은 느슨하게 정리되어 있어 손끝에 닿는 감촉도 낯설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마디 사이로 흘러내렸다. 서이현은 그것을 굳이 붙잡았다가 놓았다. 손을 떼면 될 일이었지만, 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지 않았다는 핑계로 몇 초를 더 머물렀다.

     

    “그럼 대위님한테는 쓸 일이 없겠네요.”

    스텔라가 말했다. “치이사이.”

    “당연하지.”

     

    대답이 지나치게 빨랐다. 스텔라는 그가 혹시라도 자신을 작다고 평가받은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웃을 뻔했다.

     

    “대위님은 크시니까요.”

     

    서이현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단순히 키와 체격을 말한 것이 분명한데도 문장이 어딘가 미묘하게 들렸다. 스텔라 역시 말을 끝낸 뒤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듯 입술을 다물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이현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크다는 말이냐고 물으면 지나치게 의도적인 사람이 될 것 같았고, 그대로 넘어가자니 스텔라의 귓바퀴가 조금 붉어진 것을 모른 척하기가 아쉬웠다. 그는 결국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걸 이제 알았어?”

     

    스텔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서이현은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비로소 손을 거두었다. 손바닥에 머리카락의 감촉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괜히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만진 것은 자신이면서, 흔적을 들킨 사람처럼.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산책로를 걸었다. 처음에는 반 걸음 뒤에 있던 스텔라가 어느새 그의 바로 옆으로 와 있었다. 아까 배운 단어가 머릿속에 남았기 때문인지, 서이현은 그녀와 팔이 스칠 때마다 치카이라는 발음을 떠올렸다. 가깝다. 지금의 거리를 정확히 설명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가까워진 것이 발걸음뿐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까지 함께 좁혀지고 있는지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따져보는 순간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온 모든 명분이 조금씩 무너질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서이현이 먼저 침묵을 깼다.

     

    “네?”

    “일본어. 몇 개 더 가르쳐 준다며.”

    “대위님, 생각보다 열심히 배우시네요.”

    “시작했으면 제대로 해야지.”

     

    그는 마치 업무를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사람처럼 말했다. 스텔라는 잠시 고민하다 산책로 옆 풀숲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젖은 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작은 소리를 냈고,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날벌레 몇 마리가 어지럽게 맴돌고 있었다.

     

    “涼しい。すずしい. 스즈시이. 시원하다는 뜻이에요.”

    “스즈시이.”

    “네. 오늘 같은 밤에 쓸 수 있어요.”

    “오늘은 더운데.”

    “아까는 따뜻하다고 잘만 따라 하셨잖아요.”

    “그건 네가 따뜻하다며.”

     

    말을 내뱉은 뒤 서이현은 자신이 무엇을 생략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오늘이 따뜻하다는 뜻이었으나, 문장만 놓고 보면 스텔라에게 한 말처럼 들릴 여지가 있었다. 그는 급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시선을 앞쪽으로 돌렸다. 스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뭘 웃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웃어.”

    “일본어 수업이 재미있어서요.”

    “놀리니까 재미있겠지.”

     

    서이현은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짧게 피어오르며 무뚝뚝하게 굳은 얼굴을 비췄다. 담배 끝에 불이 붙자 그는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뿜었다. 아까부터 계속 자신만 모르는 방식으로 놀림을 받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정작 수업을 그만두자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텔라가 다음에는 어떤 단어를 골라낼지 궁금했다. 그것을 발음했을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여행은 뭐라고 해.”

    “旅行. りょこう. 료코오요.”

    “료코오.”

    “끝을 조금 길게요. 료코오.”

    “료코오.”

    “네, 잘하시네요.”

    “자꾸 애 가르치듯이 말하지 마.”

    “지금은 제가 선생님인데요.”

     

    서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선생이 학생보다 한참 어린데.”

    “언어를 가르치는 데 나이는 상관없죠.”

    “계급은?”

    “수업 중에는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

    “아주 신났네.”

     

    핀잔을 주면서도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서이현은 그것을 담배 연기로 가렸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의 단어가 마음에 걸린 듯 천천히 되물었다.

     

    “...여행.”

    "네, 여행. 나중에 갈 때 엄청 도움 되겠죠."

     

    그 한 단어에서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소위가 여행을 가? 누구랑?”

     

    별것 아닌 질문처럼 던졌으나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스텔라는 그 변화가 우스워 잠깐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말고 대위님이요. 제 짬에 어떻게 여행을 가요.”

    “내가 여행을 왜 가.”

    “민호랑 가실 수도 있고요.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랑 갈 수도 있죠.”

    “다른 사람 누구.”

     

    질문은 지체 없이 튀어나왔다. 서이현은 곧바로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눈썹을 구기며 앞을 보았다.

     

    “왜.”

    “아니요. 여행이라는 말 하나에 질문이 많으셔서요.”

    “말을 애매하게 하니까 묻는 거지.”

    “제가 대위님 여행 상대까지 정해드려야 해요?”

    “네가 먼저 다른 사람이니 뭐니 했잖아.”

    “그럼 혼자 가세요.”

    “내가 여행을 왜 혼자 가.”

    “아까는 여행을 왜 가냐면서요.”

     

    서이현의 입이 다물렸다. 스텔라는 이번에는 숨기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뚱해지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며 자신이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스텔라는 이미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가볍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됐어.”

    “아까는 제대로 배워야 한다면서요.”

    “그럼 말해봐.”

     

    마지못해 허락하는 투였으나, 대답은 또 빨랐다. 스텔라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책로가 완만하게 굽어지는 지점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밤하늘이 열려 있었다. 낮게 걸린 구름이 바람에 밀려나며 그 사이로 둥근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특별할 것은 없는 달이었다. 부대에서 지내는 동안 수없이 올려다보았을, 밝고 무심한 달. 그러나 스텔라는 문득 지금이라면 그 문장을 말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뒤에 숨으면 자신의 마음도 잠깐은 무사할 수 있을 테니까.

    서이현이 재촉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데.”

     

    스텔라는 한 차례 입술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옆에 선 남자를 의식하지 않는 척했지만, 정작 온몸의 감각은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담배가 타는 냄새, 바람에 흔들리는 군복 자락,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의 무게. 한국어로는 절대로 꺼낼 수 없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계급과 나이, 그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경계선을 모두 모르는 척해야만 가능한 문장. 다른 언어라면 그에게 들키지 않고 건넬 수 있었다.

     

    “月がきれいですね。”

     

    서이현은 담배를 문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츠키가 키레이데스네.”

    “츠키가… 키레이데스네.”

     

    그가 서툰 발음으로 천천히 따라 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곧바로 잘 따라 하지 못했다. 낯선 음절이 입안에서 조금씩 엉켰고, 그럴수록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뜻은.”

    “달이 아름답네요.”

     

    서이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에 걸린 달을 몇 초간 진지하게 바라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만큼 특별한 구석은 찾지 못했다. 달은 그저 달이었다. 부대 뒤편에 매일같이 떠오르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별로 안 예쁜데.”

     

    스텔라가 입술을 말아 넣었다.

     

    “그런가요?”

    “구름에 반이나 가렸잖아.”

    “그래도 예쁘다고 말할 수 있죠.”

    “안 예쁜 걸 왜 예쁘다고 해.”

     

    서이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텔라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끝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또다시 자신만 모르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서이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부터 아무것도 아닌데 계속 웃네.”

    “대위님은 모르는 게 있어서요.”

     

    담배를 물고 있던 입이 굳었다. 서이현에게 모른다는 말은 언제나 도발로 들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스텔라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뭘 모르는데.”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삼키며 산책로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가벼웠다.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건넨 고백은 예상대로 그의 곁을 무사히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도 가슴은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뛰었다. 말하지 않은 것과 말해버린 것 사이에서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서이현은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도 저렇게 태평하게 웃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다. 따라가 뜻을 말하라고 다그칠 수도 있었지만, 고작 일본어 문장 하나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더 싫었다. 그는 결국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심통이 난 사람처럼 연기를 거칠게 내뿜었다.

     

    “별 희한한 말을 다 가르쳐주네.”

     

    앞서가던 스텔라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또 웃고 있었다.

     

    “야. 웃지 마.”

    “안 웃었는데요.”

    “지금 웃었잖아.”

    “달이 예뻐서요.”

     

    서이현은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달이었다. 뭐가 그렇게 예쁘다는 것인지, 왜 정스텔라가 혼자 의미심장하게 웃는 것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성큼성큼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스텔라는 그가 곧 자신을 따라잡을 것을 알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입가에 번진 웃음만 조용히 감춘 채, 조금 전 자신이 건넨 말의 진짜 뜻을 혼자 품고 걸었다.

     

    서이현은 그날 밤 끝까지 몰랐다.

    달이 아름답다는 말이 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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