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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현의 복장 터지는 하루Orbit 2026. 7. 30. 21:16
서이현이 그날 일을 일찍 끝낸 것은 순전히 기분이 좋아서였다. 진급 심사에 올려둔 서류 하나가 예상보다 수월하게 통과되었고, 오전부터 사람 속을 뒤집어놓던 보고 건도 스텔라가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규정 한 줄을 끌어다 붙인 덕분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서이현이 저지른 일을 합법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가 대충 던진 지시에서 정확한 의도를 건져내고, 다른 사람이라면 사흘은 붙들고 있을 일을 반나절 안에 끝낸 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다음 일을 더 얹어주었을 것이다. 잘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고, 스텔라는 자신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내는 인간이었으므로 굳이 아껴 써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웬일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퇴근 시간이 한참 남아 있는 시계를 한 번 보고, 제 앞에 반듯하게 서 있는 스텔라를 한 번 보더니 이제 그만 들어가라는 말을 툭 던졌다. 스텔라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퇴근하라고.” 서이현이 재차 말하자 그제야 그녀는 어색하게 경례를 붙이고 사무실을 나갔다. 보내주고 나서야 그는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스텔라가 없는 사무실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그녀를 일찍 보내준 자신은 생각보다 할 일이 없었다. 결국 서이현도 평소보다 이르게 가방을 챙겨 들었다.
건물을 나서자 장마 끝물의 비가 처마 밖을 통째로 가리고 있었다. 소나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집요하고, 폭우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맥 빠진 빗줄기였다. 그 아래 스텔라가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휴대전화만 내려다보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택시를 부르는 것인지 모를 얼굴로 처마 끝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서이현은 장우산을 든 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껏 집에 보내줬더니 부대 앞에서 젖은 강아지 꼴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뭐 하냐.” 그가 묻자 스텔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에 남는 우산이 있느냐는 질문에 서이현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확인해본 적은 없었지만, 있어도 없었다. 스텔라가 택시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배차 불가라는 글자를 멀뚱히 바라보는 동안 그는 먼저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따라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몇 걸음 뒤에서 군화가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다시 멈춰 섰다. 설마 저 비를 맞고 걸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결국 그가 먼저 태워다 주겠다는 말을 꺼냈고, 스텔라는 눈을 몇 번 꿈뻑거리다가 “혹시 좀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서이현은 그 질문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례는 무슨. 지난 몇 년간 제 사무실과 차와 집무용 노트북을 제 것처럼 드나들던 인간이 새삼스럽게 예의를 찾는 꼴이 우스웠다. 그는 우산을 접고 차 문을 열며 턱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타.”
차 안에는 빗물 냄새가 금세 가득 찼다. 스텔라의 젖은 군복에서 올라오는 눅눅한 냄새와 담배 연기, 에어컨의 마른 바람이 뒤섞였다. 그녀가 주소를 말하자 서이현은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는 대신 그대로 핸들을 꺾었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그대로 데려다주면 십 분이면 끝날 거리였다. 그런데 십 분이 가까워질수록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스텔라는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비에 젖은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머리카락 끝에서는 간헐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까까지 그의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던 인간이 퇴근하자마자 아무런 대비도 없이 비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없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것인지, 결국 택시도 못 잡고 혼자 비를 맞으며 걸었을 것인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서이현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글러브박스를 턱짓했다. 그 안에는 언제부터인가 스텔라가 피우는 담배가 들어 있었다. 자신의 차에 자신의 물건을 두듯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물건이었다. 스텔라가 불을 붙이자 연기가 두 줄기로 피어올랐고, 그는 그녀의 젖은 바지를 힐끗 보며 비 맞으니 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스텔라는 화를 내는 대신 제 옷자락에 코를 가까이 대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저 냄새 이상합니까?”
그 순간부터였다.
서이현의 속이 본격적으로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그는 결국 스텔라의 집 앞을 지나쳤다.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든 척할 생각이었으나 스텔라가 알아차리지 못하자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어졌다. 신호에 걸린 차 안에서 그는 그녀의 턱을 붙들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민호가 보고 싶어 한다는 핑계까지 붙였다. 노골적인 시선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가까워진 거리도 충분히 다른 뜻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스텔라는 민호라는 이름만 정확히 알아들었다. “아, 민호가 보고 싶다고 합니까?” 그 한마디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있던 경계와 긴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서이현은 턱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이마를 짚었다. 민호를 핑계로 끌고 가려 했더니 아예 민호만 보러 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스텔라는 제 젖은 옷을 내려다보며 옷을 빌려달라고까지 했다. 서이현은 헛웃음을 삼키며 액셀을 밟았다. 그래, 빌려주지. 제 냄새가 밴 옷을 입혀두면 그때는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조금쯤은 알아차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는 집에 도착한 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현관문이 열리자 민호가 제 방에서 뛰어나왔다. 스텔라는 젖은 전투화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아이의 이름을 불렀고, 민호는 그대로 그녀의 허리에 매달렸다. 서이현은 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풀었다. 차 안에서부터 이어져온 팽팽한 긴장과 제 머릿속에서만 차근차근 세워진 계획은 현관 앞에서 이미 절반쯤 무너져 있었다. 스텔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젖은 소매를 보고 손을 거두었고, 씻고 나와 놀아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숙제를 먼저 하라고 타일렀다. 민호가 순순히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숙제하라고 하면 온갖 핑계를 대며 버티는 아이가 스텔라의 말 한마디에는 군말 없이 움직였다. 서이현은 괜한 짜증을 담아 옷 꼴이 그게 뭐냐고 쏘아붙이고는 욕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말로는 애 감기 옮기지 말라고 했지만, 그의 시선은 젖은 군복에 달라붙은 그녀의 등과 허리를 오래 훑었다. 스텔라가 욕실로 들어간 뒤 그는 옷장에서 제 셔츠와 반바지를 꺼냈다. 가장 크고, 제 체취가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것들이었다. 욕실 문이 열리고 스텔라가 고개만 내밀어 옷을 찾았을 때, 그는 문을 조금 더 밀어 열며 옷가지를 가슴팍에 던지듯 안겼다. 그 정도면 적어도 얼굴을 붉히거나, 눈을 피하거나, 문을 황급히 닫는 반응쯤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스텔라는 “감사합니다. 민호 뭐 먹고 싶다고 합니까?”라고 물었을 뿐이었다.
십 분 후 욕실에서 나온 스텔라는 그의 반팔 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있었다. 반바지는 허리가 맞지 않아 몇 번이나 접혀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은 목과 셔츠 깃을 축축하게 적셨다. 서이현은 문에 기대선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옷을 입힌 것은 분명 자신이었는데, 막상 그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바로 그 때문에 더 화가 났다. 그는 꼬라지가 그게 뭐냐며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애 밥해주러 온 식모치고는 옷차림이 불순하다고 비꼬자 스텔라는 제 셔츠를 내려다보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 좀 별롭니까? 대위님 키가 크셔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더 설명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냉장고로 향했다. 식재료가 난장판이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이 꼭 오래전부터 이 집 살림을 맡아온 사람 같았다. 서이현이 등 뒤로 다가가 손을 겹치고 다른 걸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낮게 속삭였으나, 스텔라는 그의 손을 자연스럽게 밀어내고 민호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물었다. 치킨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아이는 스텔라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어? 이거 우리 아빠 냄새 나는데?” 민호의 한마디에 서이현은 미간을 눌렀다. 스텔라는 그제야 제 셔츠 소매에 코를 가까이 대보았고, 민호는 누나에게서 아빠 냄새가 난다며 깔깔 웃었다. 서이현은 아들의 뒷덜미를 잡아 떼어놓고 치킨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했으나, 십 분 뒤에는 제 휴대전화로 가장 큰 세트를 결제하고 있었다.
그가 안방으로 피신한 것은 더 이상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무슨 짓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을 닫자 거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둔탁하게 멀어졌다. 스텔라는 민호에게 닭 다리를 양보했고, 입가에 소스가 묻으면 티슈로 닦아주었으며, 숙제에서 틀린 문제까지 설명해주었다. 서이현은 침대 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스텔라를 집으로 데려와 제 옷을 입히고, 제 공간 안에서 평소와 다른 얼굴을 끌어내는 것. 적어도 오늘만큼은 완벽한 부관도, 규정을 읊는 소위도 아닌 여자로 만들어놓는 것. 그런데 정작 그녀는 제 셔츠를 입고 제 아들과 치킨을 먹으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집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풍경은 그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했다. 순간적인 욕망이 아니라, 한번 들어오면 좀처럼 내보낼 수 없을 것 같은 종류의 익숙함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이현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담배를 더 세게 비벼 껐다. 다 먹고 나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기다렸다. 적어도 민호가 방에 들어가고 나면 상황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치킨을 다 먹은 스텔라는 안방으로 오지 않았다. 그녀는 민호의 양치를 확인하고, 남은 치킨을 밀폐 용기에 옮기고, 상을 닦고,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서이현이 문틀에 기대어 다 먹었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그릇 설거지 하겠습니다”였다. 그는 잠시 자신의 말을 잘못 전달했나 고민했다. 분명 다 먹고 나서 보자고 했다. 그 정도면 누구라도 뜻을 알아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스텔라는 소매를 걷고 고무장갑까지 찾아 끼운 채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있었다. 결국 서이현은 주방까지 따라가 그녀의 등 뒤에 붙어 섰다. 누가 이딴 것을 하라고 불렀느냐고 물으니 스텔라는 아차 싶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표정을 본 순간 서이현은 마침내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 죄송합니다. 그러면 청소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서이현은 눈을 감고 미간을 짚었다. 청소. 지금 자신이 제 옷을 입은 여자를 싱크대 앞에 가둬두고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서 있는데, 그녀는 다음 집안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스텔라의 허리를 낚아채 몸을 돌려세웠다.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낮게 물었다. “내가 널 식모로 부려먹으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줄 아나.” 스텔라는 한동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이 커졌다. 서이현은 그제야 속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알아들었다. 그런데 스텔라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 알겠습니다. 1분이면 끝납니다.”
정말로 일 분 만에 끝났다. 접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씻겨 건조대에 꽂혔고, 싱크대의 물기까지 닦였다. 스텔라는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젖은 손을 셔츠 자락에 대충 닦은 뒤 결재를 기다리는 부관처럼 안방으로 걸어갔다. 빈 싱크대 앞에 홀로 남겨진 서이현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 자신이 만들어낸 분위기와 말과 시선이 저 인간에게는 고작 ‘설거지를 빨리 끝내고 방으로 집합하라’는 업무 지시로 전달된 것이었다. 웃음인지 욕인지 모를 숨이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천장을 보았다. “하…… 돌겠네, 진짜.” 안방으로 들어가니 스텔라는 침대 옆에 반듯하게 서 있었다.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보다 업무 의욕이 선명했다. 서이현이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고 턱을 들게 한 뒤, 낮은 목소리로 이제 다음 일을 줘야겠다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셔츠의 첫 단추에 손가락이 닿자 스텔라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아, 넷슴다. 노트북 어디 있습니까?”
서이현의 손이 멈췄다. 스텔라는 그 침묵을 지시가 불명확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덧붙였다. “급한 보고서면 지금 처리할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올려야 합니까?” 그 순간 문밖에서 민호가 아빠를 불렀다. 치킨을 너무 많이 먹어서 물을 마시고 싶다는 말이었다. 동시에 세탁실에서는 세탁 종료 알림음이 울렸고, 스텔라의 젖은 군복을 넣어둔 세탁기가 요란한 멜로디를 반복했다. 거실에 두고 온 서이현의 휴대전화까지 진동하기 시작했다. 부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턱을 쥔 손은 어느새 힘이 풀려 있었고, 스텔라는 그런 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대위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호는 문을 두드렸고, 전화는 끊겼다가 다시 걸려왔으며, 스텔라는 세탁물을 지금 널어야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결국 그는 문을 열어젖히며 민호에게 물을 따라주고, 전화를 받고, 세탁실에서 축축한 군복을 꺼냈다.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옆에 서서 빨래를 받아 널었다. 소매가 길어 손등까지 덮인 그의 셔츠를 입은 채 빨래집게를 하나씩 집어드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서이현은 그 옆에서 젖은 전투복 바지를 털다가 문득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기껏 여자를 집으로 끌고 와서 아들에게 치킨을 사 먹이고, 설거지를 시키고, 밤중에 나란히 빨래를 널고 있었다.
민호를 재운 뒤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스텔라는 침대 한쪽에 앉아 있었다. 젖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아 베개가 축축해질 것 같았다. 서이현은 짜증을 내며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 위에 덮고 거칠게 물기를 털었다. 스텔라는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오늘 처리한 업무를 세고 있었다. 오전 회의 자료 수정, 감찰 대응 문구 검토, 예산 항목 재분류. 서이현은 듣지 않는 척하면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한참 뒤 목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스텔라의 머리가 그의 허벅지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받쳤다.
“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비를 맞고, 뜨거운 물로 씻은 뒤 배까지 채운 탓인지 그녀는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 제 셔츠를 입은 채, 제 침대 위에서, 아무런 경계도 없이. 서이현은 깨우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무방비한 얼굴이었지만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당황도 두려움도 아닌, 그저 그를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잠든 얼굴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서이현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그는 스텔라를 침대 안쪽에 눕히고 젖은 머리카락을 베개 밖으로 빼주었다. 이불을 덮자 그녀가 잠결에 몸을 웅크리며 그의 셔츠 깃을 손끝으로 쥐었다. 서이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동안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계획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일을 일찍 끝내준 것부터, 우산을 들고 나타난 것, 차에 태운 것, 집으로 데려온 것, 제 옷을 입힌 것까지 전부 자신이 시작한 일이었으나 결과는 모두 스텔라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녀는 민호를 보고, 치킨을 먹이고, 집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까지 널었으며, 마지막에는 그의 침대를 차지했다. 정작 서이현은 하루 종일 애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제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속을 끓이고, 쓰지도 않을 보고서를 찾는 여자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잠든 스텔라를 보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협탁 불을 끄기 전,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을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그날 밤 서이현은 제 집, 제 침대 한쪽 끝에 겨우 누웠다. 스텔라는 잠결에도 그의 쪽으로 조금씩 굴러와 팔을 베고 누웠고, 그는 밀어내지도 못한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하려던 일은커녕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비를 맞고 있던 소위를 주워온 대가는 치킨값과 늘어난 설거지와 축축한 베개,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민호에게 “누나 오늘도 우리 집에 있어?”라는 질문을 받게 될 미래였다. 서이현은 제 팔 위에서 편안하게 숨 쉬는 스텔라를 내려다보다가 낮게 욕을 씹어 삼켰다.
복장이 터지는 하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시 돌아가도 그는 똑같이 우산을 기울였을 것 같았다.

이건 사실 허위매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