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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이야기 : https://summer-wish.tistory.com/25
관사의 불빛은 복도 끝에서부터 희미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고, 부대는 진작 잠들어 있었다. 낮 동안 수없이 오가던 군화 소리도, 차량의 엔진음도, 훈련장에서 쏟아지던 고함도 모두 가라앉은 뒤였다. 형광등 몇 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켜진 복도에는 정스텔라의 발소리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일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보폭이었지만 손에 든 청색 파일의 모서리는 이미 여러 번 눌리고 펴진 흔적이 있었다. 보고서는 세 번째 수정본이었다. 첫 번째에는 문단 간격이 맞지 않는다고 했고, 두 번째에는 첨부 자료의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에는 서이현이 직접 지적한 사항을 빠짐없이 반영했다. 적어도 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작성한 문서에서 숫자 하나가 틀리는 일은 드물었고, 같은 항목을 세 번이나 검토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문제는 보고서가 아니었다. 스텔라는 알고 있었다. 서이현이 며칠째 자신을 불러 세우고, 이미 끝난 업무를 다시 가져오라 하고, 타인이 보았다면 결코 흠이라 부르지 않았을 사소한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문서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며칠 전 훈련에서 그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위험 구역으로 들어간 뒤부터였다. 쓰러진 병사를 끌어내는 일은 성공했고, 스텔라가 입은 상처도 팔과 무릎의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고, 작전은 수습되었으며, 보고서에는 ‘현장 판단에 따른 긴급 조치’라는 문장이 남았다. 그러나 서이현에게는 결과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했다. 그는 스텔라가 의무실에서 돌아온 날부터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원래도 다정한 상관은 아니었으나, 이전의 냉정함이 목적을 위해 잘 벼린 칼날과 같았다면 요 며칠의 태도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감이 묻어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고,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으며, 무엇보다 스텔라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마다 더욱 불온하게 번졌다.
스텔라는 관사 앞에 멈춰 섰다. 문을 두드리기 전 잠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23시 47분. 서이현은 이 시각까지 자신을 붙잡아 둔 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고, 그저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새로운 업무를 던질 것이다. 스텔라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평소의 서이현과 다르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스텔라를 피로하게 했다.
문을 열자 거실 한쪽에 켜진 스탠드 조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군인 관사답게 가구도 장식도 단출했으나, 서이현이 머무는 공간은 유난히 정돈되어 있었다. 소파의 각도와 테이블 위 재떨이의 위치, 벽면에 걸린 제복까지 누군가 자를 대고 배치한 듯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서이현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채 식탁을 겸한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풀어 둔 상태였고, 목 언저리의 단추도 하나 열려 있었지만 흐트러져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늦은 시각까지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마저 계산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들어오는 스텔라를 한 번 올려다본 뒤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다친 무릎을 의식하지 않고 걷는지, 팔의 붕대가 교체되었는지 확인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짧은 시선이었다. 그조차도 들키기 싫었던 사람처럼 그는 곧 손을 내밀었다.
“보고서.”
스텔라는 파일을 건넸다. 서이현은 첫 장을 넘기고, 두 번째 장을 넘겼다. 읽는 척하기에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애초에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지시했고, 스텔라가 작성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세 번이나 오간 문서였다. 서이현은 특정 문장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지점에서 손을 멈췄다. 보고서를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미간을 좁히지 않았던 그가 마침내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기.”
손가락 끝이 날짜 항목을 두드렸다.
“틀렸어. 다시 해 와.”
스텔라는 그가 짚은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작전 실시일과 보고일, 첨부 자료 작성일이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잘못된 곳은 없었다. 처음 작성했을 때 한 번, 반려된 뒤 두 번, 출력하기 직전 다시 한 번 확인한 날짜였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숫자를 바라보았다. 피로 때문에 자신이 무언가를 놓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가능성은 곧 지워졌다. 날짜는 맞았다. 서이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대위님, 이 날짜는 세 번 확인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틀렸다고 했잖아.”
“근거가 있으시면 확인하겠습니다.”
서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겉으로는 여전히 느긋했다. 그러나 그가 보고서를 쥔 손끝에는 희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스텔라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화를 낼 구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숙여주기를, 자신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불만 있어?”
“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날짜를 수정하면 오히려 사실과 달라집니다.”
“세 번 확인했든 백 번 확인했든, 내가 틀렸다고 하면 틀린 거야.”
말이 끝나자 관사 안의 정적이 조금 더 짙어졌다. 서이현은 자신이 방금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문장이었다. 그는 명령을 이용했고, 규정을 구부렸으며, 필요하다면 사실의 배열까지 바꾸게 했지만 최소한 그 모든 일에는 그럴듯한 논리와 명분을 붙였다. 거짓을 지시할 때조차 그것이 진실보다 유용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과정마저 생략했다. 내가 틀렸다고 하면 틀린 거다. 그것은 상관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사람을 향한 유치하고 노골적인 억지였다.
스텔라는 파일 위에 놓인 그의 손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번 훈련 때문에 그러십니까?”
서이현의 눈빛이 아주 잠깐 굳었다. 그 반응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무슨 소리야.”
“제가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위험 구역에 들어간 뒤부터 계속 이러고 계십니다.”
“계속 뭘 해.”
“대위님답지 않게 행동하고 계십니다.”
그 말이 기묘하게 서이현의 신경을 건드렸다. 대위님답지 않게. 마치 평소의 자신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스텔라는 늘 그랬다. 그가 감추고 싶은 부분을 굳이 들추어내지는 않으면서도,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른 부하들은 서이현이 보여주는 것만 보았고, 그가 허락한 만큼만 이해했다. 그러나 스텔라는 그가 만들어 놓은 논리의 빈틈을 발견했고, 말하지 않은 지시까지 알아들었으며, 때로는 그 자신보다도 먼저 그의 선택이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했다. 그래서 곁에 두었다. 자신의 가장 정교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 적어도 서이현은 줄곧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도구가 그의 명령을 벗어나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피가 묻은 군복으로 돌아온 스텔라를 보았던 순간, 서이현은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명령 없이 움직일 수 있었고, 그의 허락 없이 다칠 수 있었으며, 그가 아무리 많은 계획을 세우고 권력을 쌓아도 어느 순간 너무도 간단하게 사라질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서이현은 스텔라를 더 자주 불렀고, 더 가까이 두었으며, 더 오래 붙잡아 놓았다. 그것을 걱정이라 부르는 순간 자신이 약자가 될 것 같아서, 그는 통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명령을 어겼으니 벌을 주는 것뿐이라고, 자신의 수족이 제멋대로 손상되는 것을 막는 일이라고, 그의 계획에 필요한 인재가 쓸데없는 희생정신으로 목숨을 낭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서이현은 파일을 책상 위로 던졌다. 종이와 나무가 마찰하는 건조한 소리가 방 안에 날카롭게 번졌다.
“명령 무시하고 설치더니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그 잘난 머리로 상황 판단을 어떻게 했길래 그따위로 움직여. 네가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내 진급에 오점 남기는 꼴은 못 봐. 알아들어?”
그는 일부러 가장 잔인한 문장을 골랐다. 네가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부터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시작한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의무실 앞에서 몇 시간이나 서성였던 일도, 군의관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할 때까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일도, 잠이 들 때마다 피투성이가 된 스텔라를 상상하고 깨었던 일도 전부 부정하려면 그 정도의 독한 말이 필요했다. 자신이 그녀를 염려했다는 사실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잔인한 상관으로 오해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을 수 있었다. 그는 명령하고, 스텔라는 따른다. 그 단순한 질서 안에서는 아무것도 잃을 필요가 없었다.
스텔라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모욕을 들었을 때조차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눈동자 한가운데에 남아 있던 작은 온기가 서서히 식는 것을 서이현은 보았다. 그것은 분노도, 상처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종류의 체념이었다. 역시 그렇습니까. 스텔라가 말하지 않은 문장이 그 조용한 눈 안에 떠올랐다.
“우선 날짜는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과가 바뀌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스텔라는 책상 위의 파일을 집어 들었다. 종이 가장자리를 정리하고, 구겨진 모서리를 손끝으로 눌러 편 뒤 몸을 돌렸다. 너무도 평소와 같은 태도였다. 명령을 받은 부하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서이현이 원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은 채 순순히 나가는 것. 그런데 막상 스텔라의 등이 자신을 향하자 서이현의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솟구쳤다. 그녀의 군화가 바닥을 한 번 두드렸다. 그 짧은 소리가 이상할 만큼 멀게 들렸다. 두 번째 걸음을 떼면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았고,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는 이전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스텔라가 문을 향해 한 걸음을 옮겼다.
“정스텔라.”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경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 순간 서이현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 그녀가 위험 구역 안으로 사라지던 뒷모습이 겹쳐졌다. 먼지와 연기 사이로, 자신의 명령을 듣지 못한 척 앞으로 나아가던 작은 등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놓쳤다. 단 몇 초였다. 손을 뻗을 겨를도 없이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서이현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만 들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짧은 무력감이 다시 목을 조였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스텔라의 손목을 감쌌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하게 끌어당겼다. 파일이 손에서 떨어졌다. 잠금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표지가 벌어지며 종이 몇 장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스텔라의 몸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섰고, 두 사람의 어깨와 가슴이 세게 부딪혔다. 놀란 숨이 입술 사이에서 짧게 터졌다.
“대위님.”
스텔라는 그의 손에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침착하려 했으나 눈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서이현은 그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 평정을 잃고, 부하의 손목을 부러질 듯 움켜쥔 채, 무엇을 원하는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남자. 그 초라하고 무질서한 모습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제가 다치든 말든 대위님께 무슨 상관입니까.”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러나 그 문장은 서이현이 며칠 동안 피하고 있던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왜 화가 났습니까. 왜 보내지 않습니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보고서를 몇 번이나 다시 가져오게 합니까. 내가 다친 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였습니까. 그녀는 단 한 문장으로 그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핑계를 무너뜨렸다. 서이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관이 없냐고 물었어?”
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 스텔라는 붙잡힌 채 뒤로 물러났고, 곧 등이 벽에 닿았다. 서이현은 그녀의 어깨 옆에 손을 짚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가둔 것인지, 자신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스텔라의 숨결이 턱 아래에 닿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희미한 비누 냄새와 밤공기의 냉기가 났다. 다친 팔을 감싼 붕대가 셔츠 소매 아래로 조금 드러나 있었다. 그 흰 천을 보는 순간 서이현의 속이 다시 뒤틀렸다.
“내 허락 없이 네 마음대로 다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대답이 아닙니다.”
“넌 내 부하야.”
“그래서 제가 다친 것이 화가 나신 겁니까?”
“말 돌리지 마.”
“돌리고 계신 건 대위님입니다.”
스텔라는 피하지 않았다. 겁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손목을 쥔 악력과 벽 앞을 막아선 몸, 평소의 나른함을 잃고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위협적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커진 눈으로 서이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가 먼저 진실을 말하기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걱정했다고. 네가 잘못될까 봐 두려웠다고. 네가 사라진 뒤의 일을 상상했으며, 그 상상 속의 자신이 너무도 끔찍하게 망가져 있어서 화가 났다고. 그 말 한마디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서이현은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에게 감정은 약점이었고, 약점은 타인에게 건네는 순간 목줄이 되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스텔라라면 더욱 그랬다. 자신이 가장 깊이 쥐고 있다고 믿었던 여자에게 오히려 목이 매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움을 분노로, 염려를 소유욕으로, 애정을 명령으로 바꾸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넌 내 거야.”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래서 가장 잘못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스텔라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없어. 그게 네 위치야.”
문장을 내뱉는 동안 서이현은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말인지 알고 있었다. 스텔라의 목숨을 걱정한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잃는 것이 두렵다고 고백하는 대신 사라질 권리조차 없다고 명령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으니, 차라리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우겼다. 그런 식으로라도 붙잡고 있으면 다시는 그날처럼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스텔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놀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서린 혼란은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치 그 말 아래 숨은 것을 끝내 알아차리고도, 그가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굳이 대신 이름 붙여주지 않겠다고 결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완벽하게 건조하고 기계적인 복종의 언어. 그 말은 서이현이 듣고 싶었던 것이었으나, 막상 들으니 가슴 한복판이 서늘해졌다. 스텔라는 그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려 했다. 큰 저항은 아니었다. 그가 놓아주리라 생각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서이현은 손을 풀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대답했습니다.”
“그게 대답이야?”
“대위님께서 제 위치를 말씀하셨고, 저는 알겠다고 했습니다.”
스텔라의 얼굴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를 몰아붙이던 질문도, 희미하게 흔들리던 눈빛도 모두 거두어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완벽한 부하로 돌아가 있었다. 서이현이 수년 동안 만들어 온 바로 그 모습이었다. 명령을 받고, 감정을 지우고, 필요한 일만 수행하는 정교한 수족. 그런데 그 완벽한 복종이 처음으로 두려웠다. 그가 원하는 대로 스텔라가 아무것도 묻지 않게 되는 순간, 자신 역시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스텔라가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서이현의 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그는 스텔라의 손목을 거칠게 끌어당기고, 다른 손으로 턱을 움켜쥐었다. 놀란 얼굴이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순간 입술을 겹쳤다. 준비할 틈도, 피할 틈도 없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다정함도 조심스러움도 없었다. 입술이 부딪히며 마른 통증이 번졌고, 스텔라의 어깨가 크게 굳었다. 그녀의 입에서 짧은 파열음이 새어 나왔지만 서이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마저 삼키려는 듯 입술을 더 깊이 눌렀다.
그것은 키스라기보다 침묵을 강요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자신이 끝내 말하지 못한 모든 것을 그녀의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을 찌르던 질문을 더는 꺼내지 못하게 막는 행동이었다. 화가 났다. 그녀가 위험한 곳으로 들어간 것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려는 것이, 자신의 감정을 이미 알아차리고도 모르는 척 바라보는 것이 전부 화가 났다. 그러나 그 분노의 가장 깊은 곳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잃을 뻔했다는 공포,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불안, 그녀가 자신의 명령보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먼저 선택했다는 질투에 가까운 원망. 서이현은 그 모든 감정을 인정하는 대신 입술에 힘을 실었다. 스텔라의 아랫입술을 거칠게 물고, 닫힌 틈을 집요하게 눌렀다.
스텔라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반응할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붙잡히지 않은 손은 허공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이현의 셔츠 자락을 느슨하게 움켜쥐었다. 밀어내기 위한 것인지,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손길이었다. 그 미세한 접촉이 서이현의 억눌린 충동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기울였고, 숨을 들이킬 틈도 주지 않은 채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타액과 거친 숨이 엉켰다. 스텔라의 입술은 처음에는 단단히 닫혀 있었으나, 막힌 숨을 견디지 못한 듯 아주 조금 벌어졌다. 그 순간 서이현은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열린 사람처럼 더욱 집요하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녀의 입 안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늘 냉정한 말만 담고 있던 입술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기묘하게 생경했다. 서이현은 그 온기를 확인할수록 오히려 화가 났다. 살아 있었다. 이렇게 뜨겁고, 분명하게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그 당연한 사실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그날 느꼈던 공포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스텔라의 입술을 거칠게 빨아당겼다. 그녀가 숨을 삼킬 때마다 어깨가 작게 들썩였고, 서이현은 그 움직임을 손바닥 아래에서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있었다. 어느 쪽의 박동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초에 불과했을 수도, 훨씬 길었을 수도 있었다. 서이현이 먼저 입술을 떼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끊어지지 못한 숨과 축축한 열기만이 남아 있었다. 스텔라는 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들이켰다. 평소의 냉철하고 빈틈없는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져 있었고, 붉어진 입술은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려 애쓰는 듯했으나,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그녀의 뛰어난 머리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서이현은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충족감이 가슴속을 채웠다. 늘 자신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고, 그의 의도를 읽어내고,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던 스텔라가 지금은 오직 그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만족감이 비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스텔라의 젖은 아랫입술을 느리게 문질렀다. 손끝 아래에서 부드러운 살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스텔라의 시선이 뒤늦게 그의 눈으로 올라왔다.
“머리 좋은 네가 파악이 안 될 리가 없는데.”
서이현은 차갑게 비아냥거렸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거칠었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일을 먼저 설명하는 쪽이 패배하는 것처럼, 그는 또다시 스텔라에게 답을 떠넘겼다. 네가 알아서 이해하라.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네가 먼저 알아차리라.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 내 앞에 들이밀지는 마라.
스텔라의 입술이 움직였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말이 끝나기 전에 서이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더 의도적이었다. 충동이라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스텔라가 질문을 완성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 입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의하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아서 다시 입을 막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뒷목을 감싸 쥐고 도망갈 여지를 완전히 없앴다. 스텔라가 짧게 숨을 삼키며 그의 가슴을 붙잡았다. 손바닥 아래 셔츠가 구겨졌다. 서이현은 그것을 밀어내는 손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그는 조금 전보다 느리면서도 훨씬 집요하게 그녀를 탐했다. 거칠게 부딪치던 힘이 방향을 바꾸어 깊이 스며들었다. 입술 사이를 헤집고, 혀끝이 닿는 순간마다 스텔라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여전히 서툴렀다. 숨을 언제 쉬어야 하는지도, 고개를 어느 쪽으로 기울여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의 움직임에 속절없이 휘말렸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이현의 움직임이 아주 짧게 멈췄다.
처음인가.
그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나 확인할 수 없었다. 묻는 순간 이 행동에 이름이 붙을 테고, 그 이름은 둘 사이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서이현은 생각을 밀어내고 다시 입술을 깊이 겹쳤다. 만일 정말 처음이라면, 자신이 그녀에게서 빼앗아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빼앗은 것이 아니라 가르친 것이라고, 그녀가 제 위치를 잊지 않도록 확인한 것이라고 억지로 의미를 바꾸었다.
그러나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스텔라의 떨림은 어떤 명령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의 숨이 자신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그 작고 불규칙한 호흡이 서이현의 가슴 안쪽을 낯설게 헤집었다. 소유욕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아프고, 욕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오래 참아온 감정이었다. 그는 그녀를 으깨듯 끌어안으면서도, 다친 팔에는 힘이 닿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손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 모순된 배려가 스스로도 우스웠다. 상처를 만들 듯 입술을 짓누르면서 이미 생긴 상처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마침내 서이현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스텔라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입술은 붉게 부어 있었고, 눈가에는 생리적인 물기가 어렸다. 그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잠깐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멀리 넘어왔는지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손끝이 굳었다. 그러나 사과는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 행동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었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스텔라가 떠날 권리까지 인정해야 했다. 서이현은 그 가능성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스텔라의 턱을 다시 움켜쥐었다. 처음보다 힘은 느슨했으나 여전히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명령이다.”
숨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두 번 다시 내 지시 없이 네 마음대로 목숨 걸지 마.”
스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다치는 것도, 죽는 것도 허락 안 해.”
그 말은 이전의 것보다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웠다. 그래도 끝내 걱정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못했다. 서이현은 얼굴을 가까이한 채 그녀의 흔들리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무엇을 찾으려는지 자신도 몰랐다. 두려움인지, 이해인지, 아니면 자신과 같은 종류의 욕망인지.
“네 목숨도, 네 몸도 함부로 굴리지 마.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아주 미세하게 낮아졌다. 명령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거의 부탁에 가까운 말이었다. 서이현은 그 사실을 감추려는 듯 다시 차갑게 덧붙였다.
“알겠어?”
스텔라는 한참 뒤에야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하려 했으나 끝에 희미한 떨림이 매달려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것이 스텔라의 첫 키스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자신의 첫 입맞춤을 명령과 벌의 형태로 가져갔다는 것도, 그럼에도 끝내 밀어내지 못했다는 것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는 순간 자신 역시 오래전부터 그를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스텔라는 그가 가장 익숙해하는 언어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짧은 복종 속에 혼란도, 원망도, 알아버린 진실도 전부 접어 넣었다.
서이현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도 곧바로 물러서지 않았다. 손끝에는 아직 스텔라의 체온이 남아 있었고, 입술에는 그녀의 숨이 묻어 있었다. 이대로 손을 놓으면 조금 전의 일이 전부 사라질 것 같았다. 동시에 놓지 않는다면 자신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손을 풀었다. 스텔라의 손목에는 손가락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본 순간 서이현의 눈이 아주 짧게 흔들렸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텔라는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한 장씩 순서를 맞추고 파일 안에 집어넣었다. 손끝이 평소보다 서툴러 두 번이나 종이 모서리가 엇나갔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끝까지 정리했다. 서이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와주지도, 멈추게 하지도 못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벽에 몰아붙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력한 얼굴이었다. 스텔라가 파일을 품에 안고 문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서이현도 붙잡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손잡이에 손을 얹었을 때,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빨리 다녀와.”
스텔라의 손이 멈췄다.
“여기서 밤새고 싶지 않으면.”
다시 보고서를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금 전의 입맞춤조차 업무 지시 사이에 끼어든 사소한 사고였다는 듯한 말. 스텔라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복도의 공기가 잠시 관사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스텔라가 밖으로 나간 뒤 문은 조용히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서이현은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얹은 손바닥에는 그녀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고, 입술 안쪽에는 자신이 물어뜯은 부드러운 감촉이 선명했다.
그는 천천히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자신이 먼저 저질러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후회해야 했다. 상관이 부하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고, 변명할 수 없는 권력의 남용이었다. 내일이라도 스텔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었다. 진급도, 계획도,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도. 서이현은 그 위험을 누구보다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스텔라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 하나가 지나치게 달고 위험하게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서이현은 곧바로 그것을 부정했다. 놀라서 굳었을 뿐이다. 상관에게 저항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의미를 붙일 일이 아니다. 자신이 한 짓은 사랑이 아니며, 고백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목숨을 던지려 한 부하에게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목줄을 조인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목줄이 채워진 쪽이 누구인지 이제는 분명하지 않았다.
복도에서는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이현은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보고서의 날짜는 처음부터 틀리지 않았다. 스텔라가 다시 가져오더라도 바뀔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다시 문을 두드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서기를. 조금 전 자신의 입술 아래에서 흔들리던 여자가 다시 완벽한 소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를.
그리고 아마 두 사람 모두, 그날 밤의 일을 먼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서이현은 그것을 명령이라 우길 것이고, 스텔라는 명령을 이해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고백도, 사과도, 관계를 정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날 이후로는 서이현이 그녀의 입술을 볼 때마다 자신이 남긴 붉은 흔적을 떠올릴 것이고, 스텔라는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가장 먼저 그의 숨결을 기억할 것이다. 이전과 같은 상관과 부하로 돌아가려 애쓸수록,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 선명해질 터였다.
그들의 시작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다시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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