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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를 모르는 너에게Orbit 2026. 7. 23. 18:48
서이현이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오래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떻게, 왜 과거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육군사관학교의 풍경과 아직 새것의 냄새가 나는 제복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들. 날짜를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이 칠 년 전, 정스텔라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날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학식이 한창인 연병장에는 스무 살의 생도들이 반듯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제복, 긴장으로 굳은 어깨,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젊은 얼굴들. 입학생 대표가 호명되자 한 사람이 대열을 벗어나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정스텔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서이현의 호흡이 멎었다.
입학생 대표 선서를 낭독하는 스텔라는 그가 알던 스물일곱의 여자가 아니었다. 볼에는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고, 크고 검은 눈에는 의심도 체념도 없었다. 수백 명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모든 것을 잘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직 부서지기 전의 눈이었다.
서이현은 그 눈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미세하게 굳어가던 눈매도, 명령을 들은 뒤 반박 대신 숨을 삼키던 버릇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스텔라에게는 그 모든 것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아직 서이현이라는 인간이 남긴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그는 스텔라를 아끼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 유능해서 곁에 두었고, 쓸모가 있으니 부렸을 뿐이라고 믿었다. 그녀가 다치는 것이 거슬렸던 것도, 다른 사람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면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던 것도 전부 제 소유물에 손을 댄 불쾌감이라 치부했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약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함부로 대했다. 부하라는 이름으로 곁에 묶어두고, 명령이라는 말로 무엇이든 견디게 했다. 그녀가 떠날 수 없도록 상처를 주면서도, 끝내 자신의 곁에 남기를 바랐다.
아끼는 법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 망가뜨리는 쪽을 택했을 뿐이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생도들의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스텔라가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서 있던 서이현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손끝으로 눈가를 훑고 나서야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텔라는 낯선 어른이 자신을 보며 우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경계하기보다 먼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입학식을 진행하던 장교 하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생도들 사이로 작은 술렁임이 번졌다. 하지만 서이현의 세계에는 지금 눈앞의 이 얼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어렸다. 찬바람에 코끝이 붉었고, 긴 속눈썹 아래의 까만 동공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느리게 깜박였다. 군복 깃은 아직 몸에 익지 않은 듯 한쪽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려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깃을 바로잡아주려다 멈췄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떨렸다. 이 아이에게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이 미래에 저지른 모든 일이 정말로 존재했던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아저씨, 왜 울어요?”
서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울긴 누가 울어.”
거짓말이었다. 또 한 줄기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스텔라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대신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훗날의 그녀라면 결코 짓지 않을 얼굴이었다. 스물일곱의 스텔라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지 않았고, 아파도 티 내지 않았으며,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잠시 눈을 감고 견뎠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었다. 보고서를 조작하게 했고, 기밀을 감추게 했으며,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대신 짊어지게 했다. 재떨이와 껌받이 같은 인간 이하의 취급까지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런 일을 이 얼굴에 했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뒤틀렸다.
“……정스텔라.”
이름을 한 글자씩 씹듯이 불렀다.
소위도, 야도 아닌 정스텔라. 언제나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불렀으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혀끝에서 굴릴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찢어지는 듯했다. 스텔라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정스텔라입니다!”
아직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은 이름이 연병장 위에 맑게 울렸다. 서이현은 그 이름을 오래 듣고 싶었다. 언젠가 그녀가 자기 앞에서 그 이름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중에, 너한테 나쁜 놈이 하나 붙을 거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겨우 이 정도였다.
“그 새끼가 시키는 대로 하지 마. 그건 네 일이 아니야. 네가 대신 더러워질 필요도 없어.”
스텔라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서이현은 그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 나쁜 놈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 아이는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무릎을 꿇고 미래의 자신을 타인처럼 욕하며 경고할 수 있었다.
“제발.”
그 말이 자기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소름이 돋았다. 서이현이라는 인간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단어였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무엇이든 빌고 싶었다. 이 아이가 자신을 만나지 않기를, 만나더라도 좋아하지 않기를, 자신의 명령보다 스스로를 먼저 지키기를. 주변에서 민간인에게 물러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듣지 못한 척했다. 떨리는 손을 들어 스텔라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참아왔던 울음이 목까지 차올랐다. 스텔라는 여전히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맑은 눈 속에는 아직 두려움도, 체념도, 증오도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사랑이 없었다.
서이현은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비참해졌다.
어쩌면 자신은 스텔라가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도, 그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되는 길을 스스로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다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 망가뜨렸고, 붙잡고 싶다는 말을 하는 대신 명령했으며, 떠나지 말라는 말을 하는 대신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오래 그녀를 사랑해왔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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