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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Orbit 2026. 7. 27. 14:01
아가타 쥰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눈동자도, 그 목소리도, 불현듯 고독의 그림자가 어리는 그 웃음진 얼굴도, 만약 어딘가에서 쥰세이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알 수 있으리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 - 그날 밤 집무실에는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는 것들이 많았다. 형광등은 수명을 다해 가는 사람처럼 몇 분에 한 번씩 희미하게 떨었고, 세 번째로 식어버린 커피에서는 이미 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유리창에 사무실 안쪽 풍경만 흐릿하게 비쳤다. 산처럼 쌓인 결재 서류와 모니터의 푸른 불빛, 벗어놓은 정모,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일을 처리하는 정스텔라의 뒷모습. 서이현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늦은 밤까지 부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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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엠바고Orbit 2026. 7. 26. 23:26
시부야역 하치코 출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도쿄의 여름이 두 사람을 통째로 삼켰다. 개찰구 안쪽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던 냉방의 찬 기운은 자동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허망하게 끊겼고, 대신 뜨겁고 축축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6월의 오후였다. 장마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 햇볕은 한여름처럼 사나웠고, 검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희끗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전광판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광고 문구와 익숙한 글로벌 브랜드의 이름이 정신없이 교차했고, 횡단보도 앞에 모인 사람들은 신호가 바뀌기도 전부터 물결처럼 움직였다. 누군가의 향수 냄새, 길가 음식점에서 풍겨오는 기름 냄새, 지하철 입구에서 밀려나오는 서늘한 바람과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한꺼번에 뒤섞였다. 낯선 도시가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은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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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 내일 아침에도 나는 여기 있을 거니까.Orbit 2026. 7. 25. 03:23
서이현이 소개팅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별것 없는 오후였다. 대대 본부 복도 끝 자판기가 또 동전을 먹었다느니, 다음 주 사격 일정이 하루 밀릴 수도 있다느니 하는 시시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누군가 정 소위 이번 주말에 소개팅 나간다던데, 하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상대가 공군이라더라며 한마디를 얹었다. 누구도 특별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적당한 나이의 미혼 여자가 주말에 사람 하나 만나는 일이 군대라고 해서 사건이 될 이유는 없었다. 서이현 역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가한가 보네.” 하고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 한마디는 제법 그럴듯하게 무심했다. 주위 사람들도 웃었고 이야기는 곧 다른 데로 넘어갔다.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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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않은 것 (인형 후편)Orbit 2026. 7. 24. 23:36
밤이 깊었다. 부대 건물의 복도는 이미 오래전 인기척이 끊겼고, 멀리서 간간이 터지는 당직사관의 무전 소리만이 정적을 얇게 긁었다. 스텔라는 보고서 파일을 가슴팍에 단단히 끌어안은 채 서이현의 관사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려 들어 올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며칠째 이어진 야근 탓인지, 사적인 공간에 상관을 찾아왔다는 긴장 탓인지는 본인도 구분하지 못했다. 세 번쯤 짧게 노크하자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관사 안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서이현의 얼굴을 절반쯤 드러냈다. 그는 편한 반팔과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샤워를 막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와 있었고, 평소보다 풀어진 차림과 달리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다만 흰자위가 조금 붉었다. 그 역시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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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Orbit 2026. 7. 24. 19:55
그날은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적어도 스텔라가 검은 인형 하나를 내밀기 전까지는 그랬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배드바츠마루 인형이었다. 검은 몸통에 삐죽 솟은 머리털, 노란 부리와 심술궂게 치켜뜬 눈. 며칠 전부터 서이현의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피로를 보고 고른 것이었다. 요즘 잠을 잘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잠이 안 올 때 이런 거라도 껴안고 있으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려고 오는 내내 몇 번이나 문장을 다듬었는데, 막상 그의 책상 앞에 서자 입에서 나온 것은 훨씬 단순한 말이었다. “대위님 닮아서 샀습니다.” 서이현은 인형을 받아 들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검은 덩어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손가락 끝으로 턱 아래를 툭 건드리자 인형의 고개가 까딱 올라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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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그러지 마. 네가 잘못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나는 아직 네가 내게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네가 없어지는 것부터 먼저 상상하게 만들지는 마.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야. 살아 돌아와줘서 다행이라고.Orbit 2026. 7. 24. 10:19
훈련 중 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받은 순간부터 서이현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위험 구역 안에 인원이 남아 있다는 것, 그 인원을 빼내기 위해 정스텔라 소위가 상부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진입했다는 것.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온 보고는 그것뿐이었다. 현장에서는 계속해서 짧은 교신이 오갔다. 인원 확인, 장비 통제, 진입 금지선 재설정. 평소의 서이현이라면 그 모든 정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정리했을 것이다. 사고의 원인을 추리고, 책임 범위를 나누고, 다음 지시를 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귀에는 분명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오는데, 머릿속에는 단 한 문장만 남았다. 정스텔라가 아직 안 나왔다.그 사실이 다른 모든 판단을 밀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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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를 모르는 너에게Orbit 2026. 7. 23. 18:48
서이현이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오래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떻게, 왜 과거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육군사관학교의 풍경과 아직 새것의 냄새가 나는 제복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들. 날짜를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이 칠 년 전, 정스텔라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날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학식이 한창인 연병장에는 스무 살의 생도들이 반듯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제복, 긴장으로 굳은 어깨,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젊은 얼굴들. 입학생 대표가 호명되자 한 사람이 대열을 벗어나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정스텔라.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서이현의 호흡이 멎었다. 입학생 대표 선서를 낭독하는 스텔라는 그가 알던 스물일곱의 여자가 아니었다. 볼에는 앳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