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그날은 비가 왔다. 11월의 끝자락, 부대 뒤편 산자락에 걸린 먹구름이 저녁부터 굵은 빗줄기를 쏟아냈고, 연병장의 흙바닥은 진작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하루 종일 낮게 깔려 있던 하늘이 끝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빗물은 사무실 창문을 쉼 없이 두드렸다. 퇴근 시간이 지난 지 한참이었으나 행정반의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스텔라는 마지막으로 수정한 보고서를 출력해 서이현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페이지 모서리는 정확히 맞춰져 있었고, 그가 붉은 펜으로 지적했던 항목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쳐져 있었다.
서이현은 보고서를 넘겨보면서도 좀처럼 퇴근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틀린 곳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완벽했다. 정스텔라는 언제나 그랬다. 그가 무리한 지시를 내리면 규정과 군법의 틈새에서 합법적인 문장을 찾아냈고, 아무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밀어 넣으면 말끔하게 끝낸 뒤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칭찬을 기다리지도,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이현은 그녀를 편리하게 여겼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다루었으며, 함부로 다루고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래전부터 이상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다만 최근의 스텔라는 어딘가 달랐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지시는 여전히 잘 따랐고, 보고서는 완벽했으며, 부르면 한 번도 늦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가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주 잠깐,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도 있는 찰나에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전에는 서이현이 턱을 들라고 하면 불쾌한 기색을 숨기면서도 곧장 마주 보았는데, 요즘은 아예 눈이 닿기 전부터 달아났다. 그 사소한 변화가 서이현의 신경을 긁었다. 자기 손 안에 있다고 믿었던 물건이 어느 날부터 안쪽에 작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서이현은 마지막 장을 덮었다.
“밥 먹자.”
스텔라가 가방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럼 내일 아침 먹자는 소리겠어?”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퇴근 시간이 늦었고, 밖에는 비가 왔으며, 저녁을 거른 부하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는 건 상관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유를 붙이면 모든 것이 간단해졌다. 스텔라의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든가, 그녀가 혼자 관사로 돌아가 문을 닫아버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든가, 요 며칠 자신을 피해 다니는 이유를 오늘은 반드시 알아내고 싶었다든가 하는 것들은 이유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이현에게는 아니어야 했다.
스텔라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빗줄기는 약해질 기미가 없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차에 있어.”
“대위님 차는 정비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서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면서도, 그래서 더 심술이 났다. “걸어가면 되잖아. 바로 앞인데.”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기에는 두 사람의 키 차이도, 어깨 너비도 맞지 않았다. 서이현이 우산을 들었지만 스텔라의 왼쪽 어깨는 금세 젖었고, 그가 우산을 그녀 쪽으로 더 기울이면 이번에는 자신의 오른쪽 팔이 빗속으로 드러났다. 몇 번이나 방향을 고치던 그는 결국 혀를 차며 스텔라의 팔을 잡아당겼다.
“붙어.”
명령하듯 내뱉은 말에 스텔라는 말없이 반 걸음 다가왔다. 젖은 군복 소매가 서로 닿았다. 얇은 천 두 장을 사이에 둔 것뿐인데도 체온이 느껴졌다. 서이현은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괜히 힘을 주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감싸거나 뒷목을 잡아 자기 곁에 세웠을 텐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손을 댈 곳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자기 부하였고, 자기 수족이었으며, 자신이 부르면 오고 밀어내면 물러나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뒤로는, 익숙했던 모든 접촉이 전과 다른 의미를 품기 시작했다.
부대 정문을 나서자 가로등 아래로 비가 사선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고깃집까지는 걸어서 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군화는 이미 물을 먹어 무거워졌다. 서이현은 몇 걸음마다 스텔라를 흘겨보았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었다. 손을 뻗어 떼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아무 관련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 새끼는.”
스텔라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름까지 알아야 돼?”
그녀가 좋아한다던 사람. 부대 안에 있고, 성격이 좋지 않으며, 가끔 다정하다는 남자. 단서를 하나씩 뱉어놓고도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그 인간. 서이현은 며칠 동안 부대의 장교 명단을 머릿속에서 뒤졌다. 스텔라와 자주 마주치는 사람, 그녀가 웃으며 대답하는 사람, 그녀에게 사소한 호의를 베풀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후보를 만들고 지우는 동안 이유 없이 화가 났고, 그 화를 보고서와 훈련 일정과 민호의 숙제에 골고루 나누어 얹었다. 정작 당사자인 스텔라에게는 더 묻지 않았다. 물으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좋아해?”
빗소리에 묻힐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읽힐 수 있었으나 서이현은 가장 불쾌한 쪽으로만 해석했다.
“만나봤어?”
“아닙니다.”
“고백은.”
“…안 했습니다.”
“왜.”
“그럴 수 없으니까요.”
대답은 단정했지만 그 안에는 체념에 가까운 것이 있었다. 서이현은 그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우산 끝에서 쏟아진 물이 군화 앞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스텔라가 두 걸음쯤 더 나아갔다가 뒤늦게 멈춰 돌아보았다.
“왜 못 하는데.”
“대위님.”
“계급이 높아?”
스텔라의 눈이 흔들렸다.
“유부남이야?”
“아닙니다.”
“그럼 애가 있어?”
그 순간 스텔라의 입술이 굳었다. 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이현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지워졌다. 비를 맞은 뺨이 차갑게 식어가는데, 몸 안쪽은 오히려 뜨거워졌다. 부대 안에 있고, 성격이 더럽고, 가끔 다정하며, 고백할 수 없는 사람. 계급이 높고, 아이가 있는 남자.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인간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결론을 인정하는 데 몇 번의 숨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나야?”
"너 나 좋아하지."
스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서이현을 미치게 했다. 그는 우산을 접지도 않은 채 처마 아래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벽과 자신의 몸 사이에 가두자 우산이 기울어 빗물이 어깨 위로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제 둘 다 젖고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스텔라의 얼굴은 평소처럼 담담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숨이 조금 빨라져 있었다. 서이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묻고 있잖아.”
그는 고백을 받아내는 방법을 몰랐다. 다정하게 기다리는 법도, 상대가 말할 준비를 할 때까지 한 걸음 물러나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있으면 명령했고, 입을 다물면 몰아세웠다. 사랑 앞에서도 그가 가진 언어는 심문과 협박뿐이었다.
“좋아하냐고.”
스텔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으면서도, 서이현은 그녀가 왜 망설이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녀의 상관이었고, 마흔을 바라보는 이혼남이었고, 열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지난 삼 년 동안 스텔라를 가장 가까이 두고 가장 잔인하게 다뤄온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바닥을 재떨이처럼 썼고, 밤낮 없이 불러냈으며, 실수를 하면 사람들 앞에서 모욕했다. 그 모든 일을 하고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을 넘어 광기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서이현은 대답을 원했다. 이미 짐작했고, 이미 확신하면서도 직접 듣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말해.”
스텔라는 결국 눈을 내리깔았다.
“…좋아합니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연속적으로 떨어졌다. 고깃집 환풍기가 둔하게 울었고, 길 건너편에서는 자동차가 고인 물을 가르며 지나갔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지만 서이현에게는 방금 전의 한마디가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
질문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목소리는 평평했지만 끝이 조금 갈라졌다.
“…임관식 날부터 좋아했습니다.”
“임관식?”
서이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임관식이면 삼 년 전이었다. 아직 소위 계급장이 어색했던 스텔라가 긴장으로 굳은 손을 들어 경례했고, 모자를 떨어뜨릴 뻔했다가 겨우 붙잡았던 날. 그는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많은 신임 장교 중 하나였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경례하던 순간만은 선명했다. 눈빛이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 실수를 숨기려고 턱에 힘을 주던 모양, 처음 이름을 불렀을 때 아주 작게 들이마시던 숨까지.
“그때부터?”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동안 내 옆에 붙어 있으면서 한마디도 안 하고?”
질책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안도였다. 자신이 그녀를 놓친 적이 없다는 안도, 스텔라의 마음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만족감, 그리고 그런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 남자가 습관적으로 뒤집어쓴 공격성이었다. 서이현의 손이 올라가 스텔라의 턱을 잡았다. 젖은 피부가 손끝에 차갑게 닿았다.
“대위님은요?”
그 질문 하나에 서이현의 엄지가 멈추었다. 스텔라는 억지로 들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질문을 되돌려준 죄를 물었을 것이다. 누가 지금 나한테 질문하랬어. 대답이나 해. 그렇게 상대의 입을 막고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스텔라는 이미 자신이 가진 가장 위험한 것을 꺼내놓았다. 이제는 그의 차례였다.
“뭘.”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이현은 대답 대신 혀로 어금니 안쪽을 밀었다. 수많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전부 걸렸다. 좋아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가벼웠고,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커서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필요하다, 가지고 싶다, 누구에게도 주기 싫다. 그런 문장들은 정직했지만 고백이라기보다는 소유권 주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스텔라가 사라질 가능성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했고,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에 눈이 뒤집혔으며,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안도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이지 않았다.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비겁한 대답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위님은요?”
스텔라는 다시 물었다. 도망칠 길을 막는 사람이 이번에는 그녀였다. 서이현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속눈썹 끝에 맺혀 있었다. 늘 완벽했던 소위는 지금 자신의 대답 하나를 기다리며 불안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도 물러날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두 글자뿐이었다. 그 말을 뱉은 순간 서이현은 자신이 무엇을 인정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스텔라의 눈이 조금 커졌고, 그 작은 변화가 그의 마지막 절제를 끊었다. 턱을 잡고 있던 손이 뒤통수로 미끄러졌다. 그는 그녀가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부딪쳤다. 처음부터 다정함은 없었다. 삼 년 동안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처럼 거칠고 집요했다. 스텔라가 놀라 숨을 들이쉬는 순간, 서이현은 그 짧은 틈까지 빼앗듯 더 깊이 고개를 기울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는 물러나지 못하도록 흔적을 남기려는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물고 눌렀다.
처마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던 고깃집 사장의 손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불씨가 젖은 바닥에 닿아 작게 꺼졌다. 군복을 입은 대위와 소위가 비를 맞으며 입을 맞추는 광경을 본 그는 눈을 크게 떴다가, 살고 싶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서이현은 한참 뒤에야 입술을 떼었다. 스텔라의 숨이 흐트러져 있었다. 자신의 것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태연한 척했다. 그녀의 젖은 얼굴과 붉게 부은 입술을 내려다보는 눈에는 평소의 나른함 대신, 제 욕망을 처음 자각한 짐승 같은 열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입술을 손등으로 한 번 닦고 몸을 돌렸다.
“…밥 먹으러 가자.”
방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고깃집 문을 잡은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게 안은 불판의 열기와 고기 기름 냄새로 후끈했다. 구석에는 퇴근 후 술을 마시던 하사 둘이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서이현은 시선을 한 번 흘기는 것만으로 그들의 고개를 테이블 아래로 처박게 만든 뒤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느슨하게 벌린 자세는 평소와 같았지만, 테이블 위 젓가락통을 의미 없이 돌리는 손가락은 전혀 평소답지 않았다.
“삼겹 이 인분. 소주 하나.”
그는 메뉴판도 펼치지 않고 주문했다. 맞은편에 앉은 스텔라를 훑어보았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 정리되지 않은 숨, 여전히 부어 있는 입술. 시선이 자꾸 그곳에 걸렸다.
“뭐 해. 앉아.”
“앉았습니다.”
“말대꾸하지 마.”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소주가 먼저 나왔다. 서이현은 병뚜껑을 따 자기 잔을 채운 뒤, 당연한 듯 스텔라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삼 년 동안 함께한 술자리에서 그녀의 잔을 채워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남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받는 것이 익숙했고, 무엇이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마시지?”
“…네.”
“오늘은 좀 마셔.”
스텔라가 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웠다. 서이현의 집게가 불판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왜 그렇게 급하게 마셔.”
“기분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 말이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다. 방금 자신과 입을 맞춰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서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서이현은 그 단순한 사실을 굳이 몇 번이나 속으로 되풀이했다. 그러고는 그 감정을 기쁨이 아니라 짜증으로 번역했다. 좋으면 좋다고 인정하면 될 것을, 그는 평생 감정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고기 먹고 마셔. 빈속에 들이키다 뻗지 말고.”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스텔라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스텔라가 웃으며 집게를 들려고 하자 손등을 가볍게 쳐냈다.
“됐어. 앉아서 먹어.”
“대위님도 드셨으면서요. 제가 굽겠습니다.”
“지금 나한테 말대꾸야?”
목소리에는 날이 없었다. 오히려 그 사실이 서이현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스텔라의 접시 위에 다시 고기를 올려놓고, 뒤늦게 자기 입에도 한 점을 넣었다. 불판 위에서 기름이 튀어 손등에 닿았지만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구석의 하사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서이현 대위가 다른 사람의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것도 정스텔라 소위에게. 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온갖 기이한 일을 보게 마련이지만, 오늘 본 것은 어디 가서 말하면 목숨이 위험할 종류였다.
“첫 연애예요.”
스텔라의 말에 서이현이 씹던 것을 멈추었다.
“뭐?”
“저, 첫 연애입니다.”
불판에서 기름이 탁 튀었다. 그 소리만이 둘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육사 수석에, 임관 동기 중 누구보다 앞서가는 엘리트. 언제나 빈틈 하나 없이 굴던 여자의 첫 연애가 자신이었다. 서이현은 소주잔을 입에 댔다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처음에는 콧바람처럼 새어나오더니, 곧 낮은 웃음으로 번졌다. 조소가 아니었다. 비웃음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서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벌벌 떨었어?”
스텔라의 귀가 붉어졌다.
“안 떨었습니다.”
“내 손에 다 느껴졌거든.”
서이현은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채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웠다.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툭 던졌다.
“귀엽네.”
뱉고 나서 스스로 놀란 듯 헛기침을 했다. 스텔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붉어진 귀가 머리카락 사이로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니까 많이 가르쳐주세요.”
서이현의 손이 잔 위에서 멎었다.
“뭘.”
“연애요.”
이번에는 정말로 말문이 막혔다. 이 여자가 지금 자신에게 연애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것인가. 이혼했고, 연애다운 연애가 무엇인지 기억조차 희미하며,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는 대신 옭아매는 법만 아는 인간에게.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말에 담긴 전적인 신뢰가 그를 이상하게 들뜨게 했다.
“야, 정스텔라.”
그는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불판의 열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일렁였다.
“너 지금 나한테 사귀자는 거야?”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서이현은 이미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고 자신도 좋아한다고 답했다. 입까지 맞추었다. 사실상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는 순서를 끝까지 바로잡고 싶어 했다. 자신이 듣고 싶은 문장을 상대의 입으로 정확히 말하게 만드는 오래된 버릇이었다.
“가르쳐달라며. 그럼 제대로 말해봐.”
“…사귀고 싶습니다. 연애하고 싶습니다. 대위님과.”
서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답의 내용이 아니라 호칭에 걸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까지 대위님이야?”
그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스텔라의 손목을 잡았다. 엄지가 맥박 위를 눌렀다. 빠르게 뛰는 박동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기 군 밖이야.”
“하지만...”
“다시 말해봐.”
서이현이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이번에는 눈이 웃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원한다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빠라고 불러.”
스텔라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서이현은 조급해하지 않는 척 기다렸으나, 손목을 잡은 엄지는 점점 더 깊이 맥박을 눌렀다.
“…이현 오빠 여자친구, 저 시켜주면 안 돼요?”
옆 테이블의 하사 하나가 마시던 소주를 뿜을 뻔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서이현 쪽을 힐끗 본 뒤 고개를 처박았다. 서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현 오빠. 그 짧은 호칭이 고막을 때리고, 머리를 관통하고,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스텔라의 맥박이 뛰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누구의 심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서이현이 말을 잃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침묵은 그에게 무기가 아니라 약점이었고, 그는 평생 누구에게도 약점을 들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목이 막힌 것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손으로 입가를 한 번 쓸었다.
“…한 번만 더.”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명령이라기보다는 갈증에 가까웠다.
“이현 오빠랑 사귀고 싶어요.”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작게 밀렸다. 서이현은 타들어가는 고기를 집게로 집어 불판 가장자리로 던졌다. 손이 떨린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마도.
“시켜달라고?”
그의 콧등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웃는 것인지 찡그리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내가 언제 안 시킨다고 했어.”
대답은 끝까지 서이현다웠다. 좋다거나, 자신도 원한다거나, 이제부터 사귀자는 평범한 말 대신 마치 허락을 내려주는 사람처럼 말했다. 자신의 감정조차 권력의 구조 안에 넣어야 안심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소주를 한 잔 비우고 빈 잔을 스텔라 앞에 내려놓았다.
“대신 조건 있어.”
스텔라가 눈을 깜빡였다.
“다른 남자한테 눈 돌리면 죽어.”
“저 첫 연애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첫 연애인 거랑 다른 남자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안 봅니다.”
“앞으로도.”
“네.”
“나만 봐.”
스텔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눈꼬리가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그 웃음이 온전히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에 서이현은 명치 안쪽이 뜨끔해졌다. 그는 또 그것을 짜증이라고 생각하며 집게를 들었다.
“웃지 마. 고기나 먹어.”
그러면서 가장 잘 익은 한 점을 다시 그녀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술잔이 몇 번 더 오갔다. 평소라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었다. 업무가 끝나면 서이현이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고, 스텔라는 대답한 뒤 물러났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스텔라는 연애를 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서이현은 자신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데이트는 자기가 정할 테니 따라오기나 하라고 큰소리쳤다. 연락은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부르면 바로 받으면 된다고 답했고, 스텔라가 그것은 지금도 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들어는 볼게.”
승낙도 거절도 아닌 대답이었다. 그는 잘 익은 고기를 그녀의 접시에 올리며 턱짓했다.
“먹으면서 말해.”
“둘이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집게가 불판 위에서 멈추었다.
“이름?”
“계속 소위라고 하시면 연애하는 것 같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소위 맞잖아.”
“여자친구이기도 합니다.”
서이현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정스텔라. 세 글자를 온전히 부르는 것이 왜 이렇게 어색한지 알 수 없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수도 없이 이름을 보았고, 명단과 보고서와 인사 기록에서 읽었지만 직접 부를 때는 언제나 소위, 야, 너, 이년 같은 말로 대신했다. 이름을 부르면 그녀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계급장이 아니라, 자신과 별개인 마음을 가진 한 여자로.
“둘이 있을 때만.”
조건부의 수락이었다.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기를 먹었다. 양 볼이 조금 부풀도록 음식을 넣고 씹는 모습을 보던 서이현은 시선을 돌리려다 입가에 묻은 기름을 발견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엄지로 그녀의 입가를 쓱 닦은 뒤, 아무 생각 없이 그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넣었다.
행동을 마친 뒤에야 무엇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서이현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귀 뒤가 붉어지고 있었다.
“더럽게 먹네.”
“대위님이 닦아주셨잖아요.”
“밖에서는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둘이 있을 때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서이현이 옆 테이블을 흘겨보았다. 하사 둘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쟤들은 사람 아니야.”
“이현 오빠.”
집게가 불판 위에 딱 부딪쳤다. 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주병을 들어 스텔라의 잔을 넘칠 듯 채웠다.
“마셔.”
스텔라는 술이 약한 편이었다. 그걸 계산해도 생각보다 빨리 취했다. 빈속에 먼저 술을 마신 탓도 있었고, 긴장이 풀린 탓도 있었다. 뺨과 귀가 분홍빛으로 달아오르고, 반듯하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서이현은 그녀가 아직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몇 분마다 턱을 잡아 눈을 확인했다.
“초점 봐.”
“멀쩡합니다.”
“그 꼴로?”
“무슨 꼴입니까.”
“취한 꼴.”
그는 엄지와 검지로 스텔라의 턱을 잡아 이쪽저쪽으로 돌렸다. 밖에서 보면 다정한 연인이 서로의 얼굴을 살피는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는 자신의 소유물이 제대로 기능하는지 점검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는 그것을 소유물이라고만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집에 갈 수 있어?”
“잘 갈 수 있습니다.”
“어디로.”
“관사로요.”
서이현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굳었다.
“우리 집 가자.”
말이 먼저 나왔다. 열 살짜리 아들이 기다리는 집에 사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여자친구를 데려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스텔라가 눈을 깜빡이자 그는 뒤늦게 이유를 붙였다.
“민호 혼자 있어. 늦었고. 너 그 상태로 혼자 보내면 쓰러질 것 같으니까.”
“안 쓰러집니다.”
“내가 쓰러진다고 하면 쓰러지는 거야.”
서이현은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사장을 불렀다. 계산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스텔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이현의 소위이자 여자친구니까 잘 갈 수 있어요.”
서이현의 걸음이 멈추었다.
서이현의.
소유격 하나가 붙었을 뿐인데 귀가 그 말을 정확히 낚아챘다. 내 사람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스텔라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라고?”
“대위님의 소위요.”
“아니.”
서이현이 말을 정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번 뱉은 말은 곧 법이었고, 번복은 패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지금 목덜미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여자친구.”
거의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낯선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여자친구. 정스텔라가 자신의 여자친구였다. 아직 현실에 제대로 붙지 않은 단어가 혀끝에서 몇 번이나 맴돌았다. 고깃집 밖으로 나오자 비는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간판의 붉은 불빛이 길게 번졌다. 스텔라는 몇 걸음 걷다가 편의점 앞에서 멈추었다.
“편의점만 들르면 안 돼요?”
“뭐 사게.”
귀찮다는 듯 물으면서도 서이현은 이미 자동문 쪽으로 걷고 있었다. 취한 여자친구를 밤길에 혼자 보내지 않는다는 생각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편의점 안은 형광등 빛으로 환했고, 따뜻한 공기 속에 달콤한 빵 냄새가 섞여 있었다.
스텔라는 음료 냉장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초코에몽 투 플러스 원...”
“그래서.”
“하나는 내 거, 하나는 오빠 거, 하나는 우리 민호 거.”
서이현은 음료를 집으려다 그대로 굳었다.
“우리 민호?”
우리. 그녀는 남의 아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 민호라고 불렀다. 보통은 가족만이 그렇게 말했다. 엄마이거나, 엄마가 될 사람이거나. 서이현은 그 생각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깨닫자 턱을 굳혔다. 스스로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떠오른 장면을 지울 수는 없었다. 자신의 집에서 민호의 숙제를 봐주는 스텔라, 아침 식탁에 세 사람의 컵이 놓인 모습, 퇴근하면 당연히 그녀가 있는 집.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밤에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먼 미래였다. 그러나 서이현은 한 번 자기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려는 사람이었다. 연애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 욕심이 얌전해질 리 없었다. 그는 초코에몽 세 개를 집었다가 잠시 멈추고 네 번째를 꺼냈다.
“민호 그거 하나론 모자라. 걔 두 개 먹어.”
계산대 위에 네 개를 올려놓으면서도 스텔라를 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면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들킬 것 같았다. 스텔라는 비틀거리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제가 살게요. 우리 민호 쑥쑥 크겠네. 아빠 닮아서 멋져지겠다.”
카드가 단말기 가까이 가기도 전에 서이현이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지갑 안으로 밀어 넣고 자기 카드를 꺼냈다.
“내가 산다고.”
“제가 사주고 싶은데.”
“누가 너한테 돈 쓰랬어.”
“여자친구가 사줄 수도 있죠.”
서이현은 결제를 마친 뒤 봉투를 한 손에 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스텔라의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길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웠으나 입에서 나온 말은 여전히 거칠었다.
“다음에 이러면 죽어.”
다음. 그것은 서이현이 좀처럼 믿지 않는 종류의 말이었다. 사람은 떠났고, 약속은 어그러졌으며, 오늘 곁에 있는 것이 내일도 그 자리에 있으리라 기대하는 일은 어리석다고 그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러나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텔라가 들어 있었다. 다시 함께 밥을 먹고, 다시 편의점에 들르고, 또 제 돈을 쓰겠다고 고집할 여자. 그때에도 자신이 곁에 있어 그녀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을 것이라는 당연한 확신.
그러므로 그것은 협박이 아니었다.
오늘로 끝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이제 두 사람에게는 다음이 있다는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