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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 첫 데이트

생크림단팥빵 2026. 7. 28. 23:14

강남역 11번 출구 앞은 사람으로 넘쳐났다. 지하에서부터 한꺼번에 밀려 올라온 인파가 계단 끝에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위로 건물 외벽에 부딪힌 한여름의 햇빛이 잘게 부서져 내렸다. 서이현은 출구에서 조금 비켜난 기둥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서 있었다. 검은 슬랙스에 짙은 네이비 니트, 손목에는 평소 차던 시계, 목덜미에는 집을 나서기 직전 별생각 없이 뿌렸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군복이 아닌 옷을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색했다. 부하를 호출해놓고 기다리는 거라면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늦은 사람의 사유를 듣고, 필요하면 질책하고, 자신의 시간표에 맞춰 다음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기다리는 것은 정 소위가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카카오톡 대화창 위에서 태연하게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친구였다. 그 단어는 아직도 낯설었다. 입 밖으로 직접 꺼내지 않았는데도 혀 위에 얹힌 이물질처럼 존재감이 선명했다.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오빠 도착했어?

 

서이현은 화면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엄지로 자판을 눌렀다.

 

 

보내고 나서 곧장 화면을 껐다. 완벽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다. 질문에 필요한 정보는 빠짐없이 들어가 있었고, 군더더기도 없었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진동이 울렸다.

 

여자친구한테 ㅇ이 뭐야 이응이 ㅎㅎ

 

이번에는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조금 오래 떠돌았다. 여자친구. 문장 한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박혀 있는 그 네 글자가 이상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스텔라는 이런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관계가 달라졌으면 달라진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맞는 행동을 요구했다. 어제까지 대위님이라 부르던 입으로 오늘은 오빠라고 불렀고, 부대에서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투정을 민간 메신저 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서이현은 무언가를 입력했다가 지우고, 다시 몇 글자를 쳤다가 전부 없앴다. 전방에 보고서 세 개를 동시에 던져놓고 십 분 안에 재작성하라고 지시하는 것보다 카톡 한 줄을 고르는 일이 어려운 자신이 우스웠다.

 

빨리 와.

 

보내고 나서 그는 혀를 찼다. 출구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훑었다. 짧은 치마, 청바지, 운동화, 원피스. 전부 남의 여자였다. 삼 년을 제 곁에 붙들어두고도 스텔라가 제대로 차려입은 사복 차림을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체력단련장에서 보았던 운동복과 관사에서 본 헐렁한 티셔츠, 기껏해야 휴일 당직 때 입고 온 무채색 니트 정도가 전부였다. 자기 여자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미묘하게 자존심을 긁었다.

 

그때 계단 위로 연녹색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옷의 색만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며 가까워지는 옅은 초록빛, 그 위에 걸쳐진 얇은 흰색 가디건, 움직일 때마다 허리께에서 가볍게 부딪히는 베이지색 가방. 그다음에는 고데기로 둥글게 말아놓은 머리카락 끝과 평소보다 공들여 그린 눈매가 눈에 들어왔다. 민소매 원피스의 목선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쇄골과 맨 어깨, 햇빛을 받아 밝아진 피부까지 차례로 인식한 순간, 서이현은 기대고 있던 기둥에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 잠깐 멎었다. 군복은 사람의 몸을 지우는 옷이었다. 계급과 소속, 직책을 남기고 그 아래의 모든 것을 비슷한 형태로 눌러버렸다. 그 안에서 스텔라는 언제나 정갈하고 유능한 장교였으며, 그의 명령을 가장 빠르게 이해하는 완벽한 부관이었다. 지금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는 그 익숙한 외피를 벗어버린 채였다. 스물일곱의 정스텔라. 데이트를 위해 머리를 말고, 화장을 하고, 아끼던 향수까지 뿌린 여자.

 

스텔라는 그의 앞에 멈춰 서자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폈다.

 

“충성.”

 

말을 뱉고 나서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이내 입꼬리가 말랑하게 휘었다.

 

“아니, 바깥이니까…… 오빠.”

 

서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표정이 관리되지 않는다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의 시선은 스텔라의 얼굴에서 시작해 원피스 자락까지 노골적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자 스텔라가 제 옷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웃었다.

 

“뭐야. 이상해?”

“……뭐야, 그거.”

“오빠 만나는 날이잖아. 힘 좀 줬어.”

 

스텔라는 그가 당연히 대답해줄 것이라 믿는 얼굴로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눈꼬리가 고양이처럼 예쁘게 휘었다.

 

“나 예뻐?”

 

예쁘냐는 질문은 곤란했다. 서이현은 누군가의 외모를 말로 칭찬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너무 쉽게 답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말 대신 손을 들어 스텔라의 턱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가볍게 붙잡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출구 앞에서 거리낌 없이 얼굴을 들어 올리고, 대답을 기다리는 맑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가디건 사이로 드러난 어깨와 목선을 가까이서 확인하자 아까보다 향기가 짙어졌다. 달콤하지만 가볍지 않고, 끝에는 시트러스의 선명한 잔향이 남는 냄새였다.

 

“예쁘긴.”

“그게 끝이야?”

“근데 이거 나만 보라고 입은 거 맞지?”

 

그의 눈은 웃는 것처럼 가늘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농담과 거리가 멀었다. 소유욕은 감추려고 할수록 더 천박해지는 감정이라, 서이현은 차라리 드러내는 쪽을 택해왔다. 스텔라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이미 몇 번이나 연녹색 원피스 위로 미끄러지는 것을 그는 보았다.

 

“다른 놈들 눈에도 예뻐 보이면 곤란한데.”

 

엄지가 그녀의 아랫입술 바로 아래를 천천히 문질렀다. 스텔라는 잠시 그 손가락을 따라 눈을 내렸다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오빠도 되게 잘생겼어. 원래도 잘생기긴 했는데.”

 

그 무방비한 칭찬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놓고 먼저 몸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스텔라는 금세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나 맛집 찾아놨어. 한식, 중식, 일식, 양식, 그 외. 뭐가 제일 당겨?” 하고 손가락을 접어가며 후보를 늘어놓는 목소리가 들뜬 아이처럼 가벼웠다. 서이현은 반보 앞선 채 걷다가 어깨 너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 찾아놨으면서 왜 물어봐.”

“그래도 오빠 취향 물어봐야지.”

“일식.”

“후토마키랑 덮밥 중에서는?”

“네가 골라.”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 하나가 스텔라를 지나친 뒤에도 고개를 돌려 한참 바라보았다. 서이현은 그 시선을 정확히 포착했다. 남자는 앞을 보지 못한 채 전봇대에 어깨를 부딪쳤고, 동행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끌고 갔다. 우스운 꼴이었다. 그러나 서이현은 웃지 않았다. 그의 턱 근육이 한 번 단단하게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아무 말 없이 뒤로 손을 뻗어 스텔라의 손을 잡고, 거의 끌다시피 제 옆으로 붙여 세웠다.

 

“가까이 붙어서 걸어.”

“왜?”

“사람 많으니까.”

 

거짓말이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스텔라가 길을 잃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도,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으나 스텔라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잡힌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얽어왔다. 깍지가 완성되는 순간, 서이현은 손에 들어간 힘을 아주 조금 늦췄다. 잡아채기 위해 뻗었던 손이 연인의 손 모양으로 정돈되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향기가 다시 코끝을 스쳤다. 서이현은 걷는 속도를 유지한 채 고개를 조금 숙였다.

 

“너 이 향수 뭐야. 처음 맡아보는데.”

“나 제일 소중한 날에만 쓰는 향수야. 임관하기 전에 첫 해외여행 갔을 때 면세점에서 샀어. 면세인데도 너무 비싸서 벌벌 떨면서 샀지. 그때는 월급도 안 나왔으니까.”

“그런 걸 왜 지금 써.”

“오늘을 위해서.”

 

스텔라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는 “아, 저기로 꺾어야 해” 하며 그의 손을 잡아 방향을 바꾸었다. 서이현의 걸음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잡은 손이 당겨지자 스텔라가 뒤늦게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늘을 위해서. 애교도, 유혹도 아니었다. 사실을 보고하듯 담담하게 내뱉은 문장이어서 더 치명적이었다. 이 여자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말을 가장 무해한 얼굴로 했다.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떤 모양으로 박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야.”

“응?”

“그런 말을 길바닥에서 해?”

 

그는 빈손으로 스텔라의 허리를 잡아 제 앞으로 돌려세웠다. 오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피해 흘러갔다. 원피스 위로 움켜쥔 허리가 생각보다 가늘었다. 몸이 거의 맞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향기가 한층 짙어졌다. 서이현은 반쯤 내리깐 눈으로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뭘?”

 

너무나 맑은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혹시 웃음을 참는다거나, 시선을 피한다거나, 장난이 들킨 사람의 흔적이 나타나기를. 그러나 스텔라는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서이현은 어금니 안쪽을 혀로 밀었다. 이 여자는 전장에서라면 한마디만 듣고도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냈다. 표면상 합법적인 문장을 어떻게 비틀어야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는지, 어느 규정을 찾아 붙이고 어떤 사실을 삭제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순간만 되면 누군가 연애를 담당하는 감각을 통째로 도려낸 것처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됐어.”

 

그는 스텔라의 등을 밀어 가게 입구로 향했다. 화가 난 것인지, 흥분한 것인지, 그저 당황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열기가 목 뒤에 고여 있었다. 그 모호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식집 안은 바깥보다 서늘했다. 두 사람은 셰프의 손이 그대로 보이는 다찌석에 나란히 앉았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운 자리였고, 의자를 당겨 앉자 다찌 아래에서 무릎까지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스텔라는 가방을 정리하자마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저를 놓고, 냅킨을 펴고, 반찬 접시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마지막에는 서이현의 컵에 물까지 따랐다. 삼 년 동안 그의 부관으로 지내며 몸에 밴 습관이었다. 연녹색 원피스를 입고 제게 오빠라고 부르는 입과 달리, 그녀의 손은 아직도 대위의 식사를 준비하는 정 소위의 것이었다. 서이현은 턱을 괸 채 그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자유로워진 것 같다가도 가장 사소한 순간에 자신이 길들인 흔적을 드러냈다. 그것이 만족스러워야 할 텐데, 오늘은 기분이 묘했다. 연애라는 이름을 붙인 뒤에도 그녀가 예전처럼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이 얻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이거랑 이거 먹어야 한대. 블로그에서 다들 그러더라. 낮이니까 술 말고 소다 마시자.”

“블로그를 몇 개나 읽은 거야.”

“별로 안 읽었어.”

 

스텔라가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넘기는 사이, 잠깐 보인 열린 탭의 개수는 스무 개가 넘었다. 서이현은 코웃음을 치며 메뉴판의 사케 항목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여기 술도 있는데.”

“데이트 이거만 하고 끝내는 거 아니잖아. 이따 저녁에 마셔야지. 아니면 하이볼 정도만?”

“너 지금 나 데리고 풀코스 돌 생각이야?”

 

그는 무릎으로 스텔라의 다리를 느리게 밀었다가 다시 붙였다. 스텔라는 그 접촉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메뉴판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응. 첫 데이트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계획적이었어. 보고서 쓸 때도 그렇게 좀 하지.”

“에이, 나 정도면 보고서 엄청 계획적으로 쓰지.”

 

서이현은 사케잔을 들려다 멈췄다. “지난달 김 중령 건은? 삼 단계로 시나리오 짜라고 했더니 이 단계에서 전부 날려먹을 뻔한 게 누구였는데.” 하고 묻자 스텔라가 입을 비죽였다.

 

“그래도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부관으로 두는 건 오빠잖아.”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가 직접 골랐고, 직접 가장 가까이에 붙여두었다. 매번 사고를 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여자였다. 서이현은 결국 코로 짧게 웃었다. 손가락으로 스텔라의 턱선을 툭 건드리고는 상체를 기울여 귓가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야. 지금 나한테 말대꾸한 거야?”

“첫 데이트니까 애교로 봐줘.”

 

스텔라는 그가 코앞에서 낮게 속삭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컵과 수저의 각도를 다시 맞췄다. 서이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여자는 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목 가까이 숨을 흘려보내고, 귓가에 입술을 댈 듯 다가가도 정작 그녀의 관심은 반찬 접시가 수평을 이루는지에 있었다.

 

“너 진짜.”

 

말을 잇지 못한 그는 사케를 한 번에 삼켰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자 셰프가 슬쩍 이쪽을 보았다. 서이현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말했다.

 

“나 지금 너한테 작업 걸고 있었거든.”

“작업?”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숨 쉴 때마다 하잖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뜻을 갖추기까지 이 초쯤 걸렸다. 자신의 들이댐과 위협과 유혹을 스텔라는 숨 쉬기나 밥 먹기와 같은 일상적인 행위로 분류하고 있었다. 서이현은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낮은 웃음이 터졌고, 어깨까지 작게 흔들렸다. 옆자리 손님이 힐끗 쳐다볼 만큼 분명한 웃음이었다.

 

“미쳤어, 진짜.”

 

그는 웃음기가 남은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의자 등받이 뒤로 팔을 걸쳤다. 감싸는 듯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게 가두는 자세가 되었다.

 

“그래. 맞아. 숨 쉴 때마다 하지. 근데 지금은 좀 다른 작업을 걸고 싶었거든.”

“금강산도 식후경이래. 다 먹고 해.”

 

그게 무엇인지 조금도 모르는 얼굴로 스텔라는 막 나온 후토마키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양 볼이 둥글게 부풀었다. 서이현은 어이가 없어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엄지로 한쪽 볼을 꾹 눌렀다. 씹는 움직임이 손끝 아래에서 잠깐 멎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맥을 끊는 재주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좋아. 먹자. 대신 다 먹으면 각오해.”

 

스텔라는 대답 대신 냠냠 씹었다. 식사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스텔라는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를 꺼냈다. “맞아. 각오해야 해, 오빠. 오늘 어디 갈 거냐면…….” 화면에는 빼곡한 일정표가 떠 있었다. 장소마다 별점과 예상 소요 시간이 붙어 있었고, 이동 동선은 색깔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아쿠아리움, 파르페가 유명한 카페, 네컷사진, 저녁 밥술, 남는 시간에 옷 구경. ‘네컷사진 꼭 찍기!’ 뒤에는 하트가 세 개나 붙어 있었다. 서이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거 작전계획서야?”

“그 정도는 아닌데.”

“별점, 예상 시간, 이동 경로. 이 하트는 뭐고.”

“귀엽잖아.”

“서이현 대위를 아쿠아리움에 끌고 가겠다고?”

 

스텔라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화면을 넘겨 다른 목록을 보여주었다. 작전 B, 방탈출. 과연 서이현 대위는 추리력이 좋을까. 문장 끝에는 괄호로 웃음 표시가 붙어 있었다. 작전 C는 보드게임, 작전 D는 둘이 함께 사주를 보러 가는 것, 작전 E는 영화 한 편과 팝콘 나눠 먹기였다.

 

“정스텔라.”

 

그가 풀네임을 부르자 스텔라가 초밥 하나를 입에 넣은 채 돌아보았다. 서이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너 이거 나 놀리는 거지?”

“왜?”

“소위가 대위 데리고 방탈출 가서 추리력을 검증하고, 보드게임으로 게임 실력을 확인하고, 사주로 궁합을 보겠다는 게 정상적인 작전 계획이야?”

“우리가 바로 헤어질 것도 아닌데 당연히 다 하고 싶은 거지. 뭐 먼저 하느냐의 차이잖아.”

 

스텔라는 냠냠 씹으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화를 내야 할 지점은 분명히 있었는데, 그 말 한가운데 박힌 우리가 바로 헤어질 것도 아니라는 문장 때문에 감정의 방향이 자꾸 미끄러졌다. 결국 남은 것은 이 여자가 자신과 함께하고 싶은 일로 하루를 빼곡하게 채워왔다는 사실뿐이었다.

 

“다?”

 

서이현은 사케 병을 들어 직접 잔을 채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숨기기 위해 병목을 평소보다 느리게 기울였다.

 

“너 그거 알아? 나 지금 진급 심사 앞두고 머리 터지게 바쁜 사람이야. 그 바쁜 사람한테 아쿠아리움이니 방탈출이니 사주니 네컷사진이니 들이밀고 있어.”

 

그 말을 들은 스텔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반짝이던 눈이 조용해졌고, 젓가락이 접시 위에 내려앉았다.

 

“……미안해.”

 

서이현은 잔을 들다 멈췄다.

 

“그러면 오늘은 밥만 먹고 헤어지자. 괜히 바쁜데 불러서 미안해.”

 

그가 원한 반응은 이것이 아니었다. 눈치를 조금 보면서도 그래도 하나쯤 하고 싶다고 조르거나, 왜 데이트하러 나와놓고 이제 와서 바쁜 척하느냐고 투정을 부리는 것. 그런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스텔라는 언제나 그렇듯 그의 말이 명령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곧장 자기 욕망을 접어버렸다. 오빠가 바쁘다고 했으니 방해하지 않겠다. 그 깔끔한 복종은 평소라면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부대에서 보고서를 들고 물러나던 정 소위의 뒷모습과 겹쳐 보여 속이 뒤틀렸다. 연인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그는 고작 한마디로 그녀를 예전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누가 헤어지래.”

 

낮게 깔린 목소리와 동시에 그의 손이 다찌 위에 놓인 스텔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게 쥔 것은 아니었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힘이었다.

 

“내가 언제 헤어지자고 했어.”

“오빠 바쁘다며.”

“바쁘다고 했지, 가라고 했나.”

“그러면 카페 가서 일할까? 나 혹시 몰라서 아이패드도 가져왔어.”

 

서이현의 손에 힘이 한 단계 더 들어갔다. 데이트에 아이패드를 가져왔다. 자신이 바쁠 가능성을 생각해서. 자신이 일을 해야 한다면 옆에서 방해하지 않고 함께 일하겠다는, 그녀 나름의 가장 합리적인 절충안이었다. 그 배려가 기특하기보다 갑갑했다. 이 여자는 언제나 그에게 맞출 준비부터 했다. 서이현은 그런 그녀를 직접 만들어놓고 이제 와 그 결과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정스텔라, 너 지금 나한테 데이트 중에 업무 제안을 한 거야?”

“오빠가 바쁘다니까…….”

“내가 언제 일하자고 했냐고.”

 

그는 스텔라의 눈높이까지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들여다보았다. 놀람과 혼란은 있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그 빼곡하게 적어놓은 거, 다 해.”

“오늘 하루에는 다 못 해. 한두 개만 골라야 해.”

“골라?”

 

서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가져와 다시 목록을 훑었다.

 

“아쿠아리움이랑 사주 보는 거.”

 

뜸을 들인 뒤 그는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 두 개 빼.”

 

아쿠아리움은 물고기 구경이 재미없다는 이유를 붙일 수 있었다. 사주를 제외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어울리는지, 얼마나 오래 갈지, 정해진 인연인지 타인의 입으로 확인하는 것은 싫었다. 궁합이 좋다고 하면 기분 나쁠 것 같고, 나쁘다고 하면 더 기분 나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둘 사이를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규정하는 상황 자체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면 방탈출, 보드게임, 영화 중에서 두 개.”

“방탈출.”

 

그는 망설이지 않고 하나를 골랐다. 밀폐된 공간, 제한된 시간, 머리를 써서 구조를 파악하고 탈출하는 게임. 통제권을 잡기 좋은 방식이었다.

 

“나머지는 영화.”

“영화?”

 

스텔라는 금세 기운을 되찾아 상영 목록을 찾기 시작했다. 화면을 몇 번 넘기던 손가락이 어느 제목 앞에서 멈췄다.

 

“나 그러면 이거 봐도 돼?”

 

그녀가 눈치를 살피며 보여준 것은 재개봉한 《냉정과 열정 사이》였다.

 

“오빠도 내가 이거 읽는 거 보고 다음 날 다 읽어왔잖아. 별로면 다른 거 찾아볼게.”

 

서이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기억나지 않을 리 없었다. 스텔라가 휴게실에서 혼자 읽고 있던 책을 별생각 없이 빼앗아 펼쳤다가 결국 관사로 들고 갔고, 다음 날 눈 밑에 그늘을 단 채 다 읽었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까지 또렷했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정말요? 하고 되묻던 얼굴.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가 함께 봐주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던 눈빛.

 

“별로라고 한 적 없잖아.”

“진짜 봐도 돼?”

“그거 보자.”

 

그는 스텔라의 휴대전화 화면을 손으로 덮었다.

 

“대신 조건 하나.”

“뭔데?”

“영화 보는 동안 내 손 잡고 있어. 두 시간 내내.”

스텔라가 작게 웃었다.

“그러면 팝콘을 어떻게 먹어.”

“왼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오른손으로 팝콘 먹고, 왼손은 내 거야. 협상 안 돼. 그리고 캐러멜 팝콘 사지 마. 달아서 싫어.”

“그러면 플레인 먹자. 어니언은 입 냄새 날 것 같아.”

 

그 말에 서이현은 사케잔을 입술에 댄 채 잠깐 멈췄다. 스텔라가 키스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새로 사귄 남자친구 앞에서 입 냄새가 나기 싫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함이 가슴 한가운데를 이상하게 찔렀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스텔라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근데 너.”

“응?”

“나랑 영화 보면서 키스할 생각은 안 해봤어?”

 

마침 가게 문이 열리며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밀려들었다. 스텔라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뭐라고?” 하고 물었다. 정말 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사케잔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방금 던진 말이 허공에 매달린 채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고 증발한 기분이었다.

 

“아니, 됐어.”

 

그는 새우튀김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바삭한 튀김옷이 씹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탈출이나 예약해.”

 

식사를 마칠 즈음 스텔라는 이미 별도의 방탈출 목록을 열어놓고 있었다. 공포, 추리, 로맨스, 호러 어드벤처까지 테마별로 나뉜 목록에는 난이도와 소요 시간, 후기 요약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보고서 양식을 데이트에 그대로 적용한 수준이었다. 서이현은 화면을 받아 스크롤을 내리다가 ‘감옥 탈출 콘셉트, 어두움 주의, 커플 추천’이라는 항목 앞에서 손을 멈췄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오빠 무서운 거 싫어하면 빼야 하나’라고 적혀 있었다.

 

“감옥.”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스텔라를 보았다.

 

“나를 가두겠다는 거야?”

 

스텔라는 뒷부분을 듣지 못한 채 예약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 사십 분 후에 한 타임 비었다. 이거 바로 예약할게? 제한 시간 안에 탈출하면 폴라로이드도 준대.”

 

폴라로이드라는 말에서 서이현의 생각이 잠깐 멈췄다. 탈출에 성공하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작은 종이 안에 자신과 스텔라가 연인처럼 남게 되는 것이다. 그는 화면을 덮고 있던 손을 천천히 치웠다.

 

“그냥 해.”

“진짜?”

“빨리 예약해. 시간 없어.”

 

방탈출 카페에 도착했을 때 스텔라는 누가 보아도 신이 나 있었다. 직원의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힌트 사용 방식과 제한 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했고, 입장 직전에는 테마 설정이 적힌 안내문을 끝까지 읽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려면 안대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먼저 검은 천을 집어 들었다.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왜.”

“오빠 어두운 거 무서울 수도 있으니까.”

 

서이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 생활을 이십 년 가까이 한 남자를 어둠이 무서울까 걱정하는 그 발상이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었다. 안대를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고는 한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먼저 직원의 안내를 따라 들어갔다. 자신보다 앞서 위험을 확인하겠다는 듯한 작은 뒷모습을 보며 그는 혀끝으로 볼 안쪽을 밀었다. 부대에서는 그녀가 위험한 곳에 먼저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놀이에 불과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선택을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철컹, 하고 육중한 문이 닫혔다. 안대를 벗자 두 사람은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감방에 갇혀 있었다. 희미한 붉은 조명 아래 낡은 침대와 서랍, 벽에 걸린 쇠사슬이 보였다. 스텔라는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듯 눈을 찡그리면서도 가장 먼저 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오빠, 괜찮아?”

 

서이현은 자기 공간의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시끄럽네.”

“무서우면 말해. 일단 뒤지다 보면 열쇠나 번호 같은 게 나올 거야.”

“네 걱정이나 해.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찾아. 힌트는 내가 볼 테니까 넌 몸으로 때울 거 찾아.”

 

익숙한 역할 분담이었다. 그는 방 전체의 구조와 벽에 적힌 기호를 훑으며 규칙을 찾아냈고, 스텔라는 서랍과 침대 아래를 구석구석 뒤졌다. 부대에서라면 비밀 문서를 합법적인 보고서로 바꾸기 위해 사용되었을 호흡이, 지금은 장난감 감옥을 빠져나오는 데 쓰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지시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행동을 시작했고, 그는 그녀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목소리의 높낮이만으로 알아들었다. 한참 서랍을 뒤지던 스텔라의 손이 어느 순간 멎었다.

 

“오빠.”

“왜.”

“서랍 열 때 조심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이현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가 있는데.”

“잔인하고 무서운 거.”

“겁먹었으면 겁먹었다고 해. 괜히 센 척하지 말고.”

“그러면 오빠도 그쪽 서랍 열어봐. 내 거랑 다른 건가.”

“싫어.”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본 거 나한테 설명하면 되지. 보고 양식 몰라? 요점만 간단히. 뭐가 얼마나 잔인하고, 단서는 뭔지. 삼십 초 준다. 브리핑 시작해.”

 

스텔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서랍 속의 물건을 꺼냈다. 잘린 사람의 머리를 본뜬 소품이었다.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텅 빈 눈동자가 드러났고, 목 아래에는 말라붙은 피처럼 검붉은 칠이 되어 있었다. 꽤 공들여 만든 물건이었다. 스텔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소품의 머리카락을 잡은 채 창살 앞으로 걸어왔다.

 

“되게 리얼해. 여기 비싸고 평점 좋은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얼굴 볼래?”

“보여줘.”

 

서이현은 천천히 벽에서 몸을 떼고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잘린 머리보다 그것을 들고 있는 스텔라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굳어 있는 턱선, 아무렇지 않은 척 다문 입술, 미세하게 초점이 흐려진 눈. 태연함 아래 숨겨진 긴장을 읽어내는 데에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소품이 아니라 그것을 쥔 스텔라의 손목을 잡았다. 힘을 주지 않은 채 엄지로 맥박이 빠르게 뛰는 안쪽을 느릿하게 쓸었다.

 

“잘 만들었네.”

“그치?”

“이제 그만하면 됐어. 내려놔.”

 

스텔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연기하느라 수고했어. 안 무서운 척.”

 

그녀는 들킨 사람처럼 입술을 한 번 달싹였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얌전히 소품을 내려놓고 다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이현이 벽면의 숫자 배열에서 규칙을 찾아 암호를 불러주면 스텔라가 자물쇠를 열었고, 스텔라가 발견한 기호를 설명하면 그는 떨어진 정보들을 연결해 다음 문을 찾아냈다. 자물쇠가 풀릴 때마다 동선은 겹쳤다가 다시 멀어졌다. 지휘하고 실행하는 관계는 익숙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구조가 이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대신 옆에서 달렸고, 때로는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다음 방으로 끌었다. 서이현은 자신이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 문이 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환한 복도의 빛이 어둠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직원이 타이머를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와, 두 분 삼십팔 분 이십사 초 만에 탈출하셨어요. 저희 매장 신기록이에요!”

 

스텔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직원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와 두 사람을 벽 앞에 나란히 세웠다. 서이현은 사진을 찍는 일이 마뜩잖은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섰지만,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둠 속에서 시체 소품을 들고 태연한 척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오롯이 기쁨만 남은 스물일곱의 얼굴이 그의 바로 곁에서 웃고 있었다.

 

“좋아?”

“네!”

 

대답은 너무 빠르고 밝았다. 그의 팔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셔터가 눌리는 순간 서이현은 렌즈를 보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숙여 스텔라의 머리카락에 코끝을 묻었고, 그 행동이 그대로 사진에 남았다. 직원이 건넨 폴라로이드 위로 이미지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텔라는 입김을 호호 불며 사진을 흔들었다.

 

“오빠 앞에 봐야지.”

“앞에 안 봐도 네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는 다 찍혔을 텐데.”

 

그는 몸을 숙여 스텔라의 귓가에 낮게 덧붙였다.

 

“내가 뭘 보고 있었는지도.”

 

그러나 스텔라는 또다시 그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카운터 위에 놓인 색색의 펜을 발견하자 곧장 직원에게 “이거 꾸며도 돼요?” 하고 물었다. 서이현은 팔짱을 낀 채 뒤에서 그녀가 사진 위에 무언가를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가까이 다가간 그의 눈에, 자신의 머리 위로 뾰족한 늑대 귀와 시커먼 코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스텔라의 얼굴에는 고양이 귀와 수염, 동그랗게 말린 꼬리까지 야무지게 붙어 있었다.

 

“정스텔라.”

 

오랜만에 성까지 붙은 이름이 나오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리 내놔.”

 

스텔라는 혼날 것을 예상한 아이처럼 풀 죽은 얼굴로 사진을 건넸다. 서이현은 제 얼굴에 그려진 늑대 귀를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사진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 표정을 보자 모든 말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손을 뻗어 스텔라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손길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됐어.”

“진짜?”

“가자. 영화 시간 늦겠다.”

“잠깐만. 하나만 더 써야 해.”

 

스텔라는 다시 사진을 받아 하얀 여백에 글씨를 꾹꾹 눌러 적었다.

 

서이현♥스텔라
2026.07.27. 첫 방탈출♥

 

서이현은 그 유치하고 낯간지러운 문장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날짜와 이름 사이에 찍힌 하트, 늑대와 고양이로 변해버린 두 사람. 전부 자신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 속에 자신이 있었다. 스텔라가 계획한 하루의 한가운데, 그녀가 오래 간직하려는 기억 속에 너무나 당연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사진을 다시 받아 들었다. 이번에는 바지 주머니에 대충 넣지 않았다. 지갑을 열어 신분증과 카드가 들어 있는 안쪽 칸, 구겨질 가능성이 가장 적은 곳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지갑을 닫은 뒤에야 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손목이 아니라 손이었다. 손가락을 단단히 감싸 쥔 채 그는 영화관이 있는 방향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팝콘은 내가 산다.”

 

스텔라가 그의 옆으로 종종걸음을 쳐 따라붙었다.

 

“캐러멜은 안 돼.”

 

 


 

 

영화관이 있는 층으로 올라서자 공기의 냄새부터 바뀌었다. 버터와 설탕이 눅진하게 뒤섞인 팝콘 냄새, 갓 닦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세제 냄새, 상영 시간을 확인하며 떠드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방탈출 카페에서 나온 뒤에도 스텔라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기록을 세운 것이 자랑스러운지, 조금 전 자신들이 풀었던 암호가 사실은 생각보다 쉬웠다느니 마지막 자물쇠는 자신이 먼저 규칙을 알아챘다느니, 지갑 속에 들어간 폴라로이드 사진은 집에 가면 투명 케이스에 넣어야겠다느니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서이현은 그 말을 대부분 흘려듣는 척했지만 실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스텔라가 신이 나면 문장의 끝이 평소보다 조금 높아진다는 것, 말하면서 손을 크게 움직이는 바람에 잡고 있던 손까지 함께 흔들린다는 것, 자신이 대답하지 않아도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것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 귀를 간질였다. 부대에서는 보고의 요점만 남기라고 수없이 가르쳤고, 불필요한 말이 길어지면 눈길 하나로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의 쓸모없는 말들이 끊기는 것이 오히려 싫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하루의 사소한 감상들까지 전부 제게 흘러들어오는 이 상태가, 그가 생각했던 연애라는 것에 가장 가까운 모양일지도 몰랐다.

 

“오빠, 팝콘은 진짜 플레인으로 살 거야?”

“아까 말했잖아.”

“반반도 있는데.”

“캐러멜 싫다고.”

“치즈도 있어.”

“그건 냄새 나.”

“오빠 되게 까다롭다.”

 

서이현은 매점 앞에 선 채 스텔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메뉴판을 올려다보느라 목을 길게 뺀 상태였고, 잡고 있던 손은 놓을 생각이 없는지 그의 손가락 사이에 그대로 얽혀 있었다. 두 시간 내내 손을 잡고 있으라는 조건을 장난처럼 받아들였으면서,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너무 자연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서이현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자 스텔라가 고개를 돌렸다. “왜?” 하고 묻는 얼굴에는 불편하다는 기색보다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리는 호기심이 먼저 떠올랐다. 그는 대답 대신 주문대 쪽을 바라보며 플레인 팝콘 하나와 콜라 두 잔을 주문했다. 스텔라는 자기 몫의 콜라를 따로 사는 것이 아깝다며 하나만 나눠 마시면 안 되느냐고 했지만, 서이현은 듣지 않았다. 팝콘은 오른손으로 먹고 왼손은 자기 것이라고 이미 정해두었으므로 콜라까지 나누어 마시면 손이 모자랐다. 그 말을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어 “네가 다 마시고 내 것까지 뺏어 먹을 게 뻔하니까”라고 했고, 스텔라는 자신을 뭘로 보는 거냐며 볼을 부풀렸다. 그러면서도 상영관으로 가는 동안 제 콜라보다 그의 콜라를 먼저 한 모금 마셨다. 서이현은 빨대 끝에 남은 미세한 립 자국을 내려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같은 빨대에 입을 댔다.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의 유치함을 인지한 순간 턱이 굳었으나, 옆에서는 스텔라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영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상영관 안은 아직 광고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스텔라는 좌석 번호를 두 번이나 확인하고도 앞장서서 엉뚱한 줄로 들어갔다가, 서이현이 허리를 붙잡아 방향을 돌려놓자 민망한지 작게 웃었다. “나 극장 잘 안 와서 그래.” 변명하는 목소리가 밝았다. 두 사람의 자리는 중앙보다 조금 뒤쪽, 화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서이현은 스텔라를 안쪽에 앉히고 자신이 통로 쪽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지나갈 때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 낯선 사람이 스텔라의 무릎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는 팝콘 통을 두 사람 사이의 팔걸이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펼쳤다. 스텔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손가락을 한 번 까딱였다.

 

“왼손.”

“벌써?”

“영화관 들어왔잖아.”

“광고도 안 하는데.”

“조건에 광고 제외라고 안 했어.”

 

스텔라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순순히 왼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이 그의 손바닥 위에 얹히자 서이현은 곧바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무엇이기에 자신이 이것을 조건까지 붙여 요구했는지, 그는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스텔라의 손이 제 손 안에 들어와 있으면 불필요하게 주변을 살필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시선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손바닥의 온도와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감각만으로 알 수 있었다. 군에서 그는 언제나 사람의 위치를 보고받았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통제 범위 안에 들어와 있는지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보고 대신 온기가 있었다. 스텔라가 팝콘을 집으려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깍지 낀 손도 함께 따라왔고, 그 사소한 당김이 기묘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그는 스크린에 떠오른 광고를 보는 척하면서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일정한 리듬으로 쓸었다. 스텔라는 처음에는 그 움직임을 의식한 듯 손가락을 움찔했으나 이내 영화 예고편에 정신이 팔려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본편이 시작되자 스텔라는 정말로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팝콘이 너무 짜다느니 화면이 생각보다 크다느니 종알거리던 입이 닫히고, 거대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푸른색과 금색의 그림자를 번갈아 드리웠다. 주인공이 웃을 때면 그녀의 입꼬리도 무의식적으로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이 엇갈리는 장면에서는 미간이 조금씩 좁아졌다. 서이현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보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스텔라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문장을 화면 속 배우가 말하는 순간 숨을 아주 작게 들이마시는 것, 다음 장면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긴장하는 것, 슬픈 장면이 가까워질수록 잡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부대에서의 스텔라는 자기 감정을 타인에게 들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두려워도 표정이 없었고, 억울해도 목소리는 고르게 유지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약점이 되고, 약점은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다는 것을 그녀에게 가장 잔인하게 가르친 사람이 바로 서이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허구의 인물들이 엇갈리는 모습만으로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무방비함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불쾌했다. 자신에게는 좀처럼 내보이지 않는 얼굴을 스크린 속 남자에게 너무 쉽게 내어주는 것 같았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스텔라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한 번,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다 천천히. 스텔라의 시선은 여전히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숨이 아주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그 작은 반응에 서이현은 만족하지 않고 손목 안쪽까지 입술을 옮겼다. 맥박이 뛰는 곳에 입을 맞추자 스텔라가 마침내 그를 돌아보려 했으나, 화면에서 중요한 대사가 흘러나오자 곧바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이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고 있는데 영화의 대사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내려놓은 뒤 이번에는 오른손을 스텔라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연녹색 원피스 자락 아래로 드러난 맨살이 손바닥에 닿았다. 스텔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이제야 반응다운 반응이 나왔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잠깐 그 손을 내려다본 뒤 아무 말 없이 다시 영화를 보았다. 떼어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허락의 표시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가 곁에 있으니 당연히 닿을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무심한 신뢰가 그의 손끝을 더 느리게 만들었다. 그는 허벅지 바깥쪽을 천천히 쓸어 올리다 원피스 자락 바로 아래에서 멈추었고, 다시 무릎 쪽으로 내려왔다. 스텔라는 처음 몇 번은 숨을 얕게 들이마셨지만 곧 그것마저 익숙해진 듯 스크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문제는 눈물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혼자 남겨지는 장면에서 스텔라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처음에는 스크린의 빛이 반사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투명한 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이현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 눈을 깜빡이지 않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눈물이 떨어졌다. 허구의 인물, 그것도 화면 속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스텔라가 진심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영화에 몰입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읽었던 원작의 장면이었고, 누구라도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치밀었다. 질투라고 부르기에는 상대가 존재하지 않았고,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더 지독했다. 자신의 옆에 앉아 제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감정만큼은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스텔라가 견딜 수 없었다.

 

허벅지에 올려둔 손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살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압력에 스텔라의 몸이 굳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고인 눈이 어둠 속에서 놀란 듯 커졌다. 서이현은 그녀를 보지 않는 척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고정했다. 다른 손으로 팝콘 하나를 집어 스텔라의 입술 앞에 가져갔다.

 

“울지 마.”

 

효과음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스텔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는 그 틈으로 팝콘을 밀어 넣었다.

 

“씹어.”

 

스텔라는 반사적으로 팝콘을 씹었다. 눈물이 뺨에 남은 채였다. 서이현은 허벅지를 쥐었던 손에서 힘을 조금 늦췄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삼켜.”

 

스텔라가 팝콘을 삼킨 뒤 그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워하면서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왜 이러느냐고 물을 법한데, 그녀는 잠깐 눈을 깜빡이기만 하다가 다시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이현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보고 싶나. 자신이 옆에서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보다 영화의 결말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팝콘을 하나 집어 그녀의 입가에 댔다. 이번에는 스텔라가 순순히 입을 벌렸다. 그 행동이 또 마음에 들어 화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영화가 끝을 향해 갈수록 스텔라는 몇 번 더 울었다. 서이현은 더 이상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흐를 때마다 엄지로 뺨을 닦아주었고, 스텔라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어느 순간에는 닦아주는 손바닥에 뺨을 아주 조금 기대기까지 했다. 의식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이현은 움직이지 못했다. 따뜻한 뺨이 손바닥 안에 얹혀 있는 동안, 방금까지 들끓던 불쾌감이 이상할 만큼 빠르게 가라앉았다. 스크린 속 남자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닦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녀가 기억할 감각도 어쩌면 배우의 얼굴보다 자신의 손바닥일지 몰랐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이겨야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상영관 안에 희미한 불이 켜졌다. 스텔라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울었는지 깨달은 듯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부어오른 눈과 번진 화장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지금 못생겼어.”

“뭐?”

“보지 마!”

 

스텔라는 얼굴을 가린 채 총총걸음으로 통로를 빠져나갔다. 서이현은 붙잡을 틈도 없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두 시간 내내 자신을 거의 무시하고 영화만 보더니,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못생겨 보일까 걱정하는 모순이 우스웠다. 그는 빈 팝콘 통을 한 손으로 찌그러뜨렸다가 다시 펼쳤다. 스텔라가 앉았던 의자에는 체온이 조금 남아 있었고, 왼손에는 그녀와 오래 맞잡고 있던 감각이 선명했다. 두 시간 동안 한 번도 손을 놓지 않았다. 팝콘을 먹을 때도, 눈물을 닦을 때도, 마지막 장면을 볼 때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약 오 분 후, 스텔라가 화장을 고친 얼굴로 돌아왔다. 눈물 자국은 사라졌지만 살짝 부은 눈매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앞에 섰다.

 

“다 했어.”

 

서이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눈가에 남은 붉은 기, 다시 정돈된 머리카락, 새로 바른 립 제품 때문에 조금 더 반짝이는 입술. 방금까지 울던 사람 같지 않게 멀끔했으나, 그에게는 오히려 전보다 더 무방비해 보였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하네.”

“아까도 예뻤거든.”

“누가.”

“내가.”

 

그녀가 뻔뻔하게 대답하자 서이현은 코웃음을 치며 손목을 잡았다. 상영관 출구로 나가는 대신 사람들이 거의 지나지 않는 복도 끝, 비상구가 있는 어두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텔라는 순순히 끌려오면서도 왜 그쪽으로 가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디 가?”

“잠깐.”

“왜? 팝콘 남았어?”

 

그 질문에 서이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팝콘. 자신이 두 시간 내내 질투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속이 뒤집히는 동안, 이 여자는 여전히 팝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스텔라를 비상구 철문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등이 차가운 문에 닿으며 낮은 소리가 났다. 한 손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고, 다른 팔은 허리를 감아 몸 사이의 거리를 지웠다. 스텔라의 눈이 뒤늦게 커졌다.

 

“영화보다 설레는 거.”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울어서 조금 붉어진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알려준다 그랬잖아.”

 

입술이 닿기 직전에서 멈추자 스텔라의 숨이 얕게 흔들렸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네가 아까 놓친 거.”

“내가 놓친 영화 내용이 있어?”

 

서이현은 그대로 굳었다.

 

스텔라는 갑자기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른 얘기해봐. 오빠 감상은 어떤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이현은 차가운 철문과 자신의 몸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 서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만 선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 게 분명했다. 그는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마가 스텔라의 관자놀이 가까이 닿았다.

 

“그래.”

 

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그녀의 뺨을 감쌌다. 엄지가 아직 조금 부은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네가 놓친 내용.”

“뭔데?”

“주인공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보면서 우는 걸 봤어.”

 

스텔라는 눈을 깜빡였다. 서이현은 차분한 영화 평론가처럼 말을 이어갔으나, 눈빛은 전혀 차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화가 났지. 자기 남자는 바로 옆에 있는데, 스크린 속에서 죽지도 않은 놈 때문에 울고 있으니까.”

“그런 장면 없었는데.”

“있었어.”

“언제?”

“방금.”

 

그의 손가락이 스텔라의 원피스 어깨끈을 가볍게 걸었다. 얇은 천이 손끝을 따라 조금 움직이자 그녀의 눈이 그제야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가 찍고 있는 영화에.”

“뭐야. 그거 영화 내용 아니잖아.”

“영화 내용 맞아.”

 

서이현은 어깨끈을 아주 조금 아래로 밀었다가, 드러난 피부 위에 손끝을 멈췄다. 스텔라의 숨이 눈에 띄게 얕아졌다. 이제야 알아듣는구나. 그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독은 나고, 주연은 너랑 나야.”

“오빠…….”

“엔딩은 아직 안 정했어.”

 

그는 그녀의 뺨을 쥔 채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두 시간 동안 자신이 견뎌야 했던 모든 우스운 질투와 조바심과 패배감이 그 짧은 거리 안에 고여 있었다.

 

“네 반응 보고 결정하려고.”

 

그러나 스텔라는 그의 품 안에서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아직 플롯 반도 안 왔어.”

 

서이현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뭐?”

“우리 네컷사진도 찍고, 오빠 옷도 보러 가고, 저녁도 먹어야 하잖아. 지금 이러고 있으면 다 못 해.”

 

그녀는 한쪽 어깨가 드러난 채, 허리는 그의 팔에 감겨 있고, 몸은 차가운 철문과 서이현 사이에 완전히 갇혀 있으면서도 진지하게 남은 일정을 걱정하고 있었다. 영화보다 설레는 것을 알려주겠다는 남자를 앞에 두고도 플롯 진행률을 계산했다. 서이현은 그녀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던 웃음이 헛바람처럼 새어 나왔다.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였고, 이마를 스텔라의 어깨에 기댄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오빠?”

“알았어.”

 

그는 패배를 인정하듯 중얼거렸다.

 

“알았다고.”

 

몸을 조금 뒤로 물린 서이현은 흘러내린 어깨끈을 제 손으로 다시 올려주었다. 손길은 사무적인 척했지만 맨살을 스치는 손가락은 필요 이상으로 느렸다. 그는 어깨끈이 원래 자리를 찾은 뒤에도 잠시 그곳에 손을 얹고 있다가, 마침내 한 걸음 물러섰다.

 

“네컷사진, 옷 구경, 저녁. 전부 해.”

“진짜?”

“대신 순서랑 내용은 내가 정한다.”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농밀하게 가라앉았던 눈빛은 사라지고, 다시 무언가를 지휘하려는 대위의 얼굴이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완전히 숨기지 못한 웃음이 남아 있었다.

 

“네가 짜온 그 빡빡한 계획서는 지금부터 폐기야. 이의 있나?”

 

스텔라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부어 있는 눈이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없습니다!”

 

그 환한 대답 앞에서 서이현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방금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허락했는지도 모른 채, 데이트가 계속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렇게 기뻐하는 얼굴. 그는 이 여자를 굴복시키는 데 삼 년을 썼고, 이제 와서는 그녀가 웃는 얼굴 하나에 자신이 매번 먼저 항복하고 있었다.

 

“……따라와.”

 

서이현은 몸을 돌려 밝은 복도로 걸어 나갔다. 스텔라가 뒤에서 경쾌한 발소리로 따라붙자 손을 뒤로 내밀었다. 이번에도 손목이 아니라 손을 잡았고, 손가락 사이를 빈틈없이 얽었다.

 

“다음은 네컷사진.”

“소품도 쓸 거야?”

“내가 고른다.”

“요즘은 소품 없이 찍는 게 유행인데.”

“입 다물어.”

“진짜 서른아홉 같다. 큭큭.”

 

서이현의 걸음이 복도 한가운데서 우뚝 멈췄다. 깍지 낀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뒤늦게 고개를 든 스텔라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확신했다. 오늘 밤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몇 번이나 더 참아야 할지는 몰라도, 이 여자가 웃으면서 서른아홉을 입에 올린 횟수만큼은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서른아홉. 그 숫자가 스텔라의 입에서 웃음과 함께 굴러나오는 순간, 서이현은 복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바람에 깍지 낀 손으로 연결되어 있던 스텔라도 반걸음 뒤로 당겨졌다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꼬리에는 아직 웃음이 남아 있었고, 울어서 조금 부은 눈은 장난기가 어린 채 반달처럼 휘어 있었다. 그 얼굴 어디에도 악의는 없었다. 단지 스물일곱의 여자가 열두 살 많은 남자친구를 놀리는, 흔하고 사소한 장난일 뿐이었다. 서이현도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숫자는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그의 신경을 긁었다. 서른아홉. 진급을 앞둔 육군 대위, 이혼한 남자, 열 살짜리 아들을 둔 아버지. 스텔라와 나란히 걷는 지금조차 그에게 붙어 있는 것들. 반면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여자는 연녹색 원피스를 입고 네컷사진이니 옷 구경이니 하는 이야기에 눈을 빛내는 스물일곱이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않던 열두 해가, 그녀의 웃는 입술을 통해 갑작스럽게 실체를 얻었다.

 

그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스텔라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가 가슴 가까이로 딸려오며 눈을 크게 떴다. 서이현은 빈손으로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영화관 복도였지만 주변의 시선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 이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을 놀리고도 조금도 겁먹지 않은 얼굴 하나뿐이었다.

 

“그래.”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화를 누르는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 이미 상대에게 내릴 처분을 결정한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서른아홉이다.”

“응. 내가 방금 말했는데.”

 

대답이 너무 태연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스텔라는 붙잡힌 턱을 빼내려 하지도 않은 채 눈만 깜빡였다. 서이현은 엄지로 조금 전 웃음을 머금었던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요즘 유행 같은 건 알 필요가 없어. 나는 내 방식대로 해. 원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네컷사진 찍는 데 무슨 방식까지 있어.”

“있어.”

 

그는 즉답했다.

 

“소품 없이 찍는 게 유행이라고 했지. 좋아. 소품 없이 찍어.”

“그러니까 내 말이...”

“대신 포즈는 내가 정한다. 스물 일곱. 이의 있나?”

 

스텔라의 입이 다물렸다. 서이현은 그제야 만족한 듯 턱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손까지 놓지는 않았다. 깍지는 더 단단해졌고, 그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스텔라는 끌려가듯 몇 걸음 따라오다가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서른아홉.”

“실컷 웃어둬.”

“왜?”

“사진 찍고 나서도 웃음이 나오나 보게.”

 

네컷사진 부스가 모인 구역은 영화관보다 훨씬 밝고 시끄러웠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하는 여자들, 소품 바구니를 뒤지며 깔깔대는 연인들, 방금 인화된 사진을 들고 모여 결과물을 확인하는 친구들 사이를 지나면서도 서이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스텔라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떤 프레임이 예쁜지, 어디가 조명이 좋은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작전 지역에 도착해 지형을 살피는 참모처럼 진지했으나 검토 대상이 토끼 귀와 분홍색 리본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스텔라가 가장 안쪽의 부스를 가리켰다. “여기가 사람도 별로 없고 배경색도 예뻐.” 서이현은 대답 대신 커튼을 젖혀 그녀를 먼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좁은 공간 안에는 작은 의자 하나와 카메라, 터치스크린이 전부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으면 어깨와 무릎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크기였다. 스텔라는 화면 앞으로 다가가 프레임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서이현은 그 뒤에 서서 커튼을 끝까지 닫았다. 얇은 천 한 장이 바깥의 소음과 시선을 차단하자 공간의 공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조금 전 비상구 앞에서 채 끝내지 못한 긴장감이 다시 좁은 부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이거 어때? 하트 있는 거.”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어디 있어. 이건 너무 유치하고, 이건 색이 안 예쁘고...”

 

서이현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십 초의 카운트다운이 나타났다.

 

“앉아.”

“잠깐만, 아직...”

 

그는 스텔라의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힌 뒤 자신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았다. 앉아서 나란히 찍을 것이라 생각했던 스텔라가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안 앉아?”

“좁아.”

“그러면 오빠 얼굴 잘려.”

“안 잘려.”

 

서이현은 스텔라의 양손을 잡아 제 목 뒤로 올려놓았다.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감쌌고, 그는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화면 속 두 사람은 연인이라기보다 금방이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삼킬 듯 가까이 붙어 있었다. 카운트다운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만 봐.”

“카메라 봐야 사진이...”

“카메라 보지 마.”

 

명령이 떨어지자 스텔라는 습관처럼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불만이 없지는 않은 듯 입술이 조금 튀어나왔지만, 끝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첫 번째 플래시가 터졌다. 화면에는 서이현의 목을 감고 그를 바라보며 웃는 스텔라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서이현이 담겼다. 두 번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나 그러면 잘 나오는지 모르는데.”

“못생기게 나올 리 없어.”

“왜?”

 

그는 그녀의 허리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좁은 의자 끝에 걸터앉은 몸이 그의 무릎 가까이 밀려왔다.

 

“내가 보고 있는데 감히 어떻게 못생기게 나와.”

 

스텔라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휘었다. 두 번째 플래시가 터지기 직전, 서이현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감싸 입술을 겹쳤다. 놀란 눈이 동그래지는 순간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사진에는 입을 맞추는 남자와, 예상하지 못한 키스에 굳어버린 여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았다.

입술이 떨어지자 스텔라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뭐가 웃겨.”

“나 이거 첫 키스인데. 여기서 할 줄은 몰랐네.”

 

세 번째 카운트다운이 흐르고 있었지만 서이현은 카메라를 잊었다. 그는 스텔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첫 키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두 사람의 첫 입맞춤이 이런 밝고 유치한 부스 안에서 이루어졌을 리 없었다. 훨씬 은밀하고,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선을 넘은,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스텔라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지금 이 여자는 자신이 서른아홉이라는 것을 놀린 데 이어 그 기억까지 지워버리는 척하고 있었다. 세 번째 플래시가 터졌다. 화면에는 카메라를 무시한 채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찍혔다. 서이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래?”

 

그는 뒷목을 감싼 손을 풀고 대신 그녀의 뺨을 감쌌다. 엄지가 조금 전 입을 맞췄던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그럼 이것도 처음이겠네.”

 

마지막 카운트다운 숫자가 삼에서 이로 바뀌는 순간, 그는 스텔라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살짝 붉어진 입술과 그것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충분히 위험했다. 마지막 플래시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기억력이 그렇게 안 좋아서 어떡하나.”

 

서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스텔라의 턱 끝을 한 번 쓸었다.

 

“중요한 건 전부 잊어버리고.”

“사귀고 나서는 이게 처음이잖아.”

 

스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고쳤다. 그제야 서이현은 자신이 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묘하게 조건을 덧붙여 틀린 말을 맞는 말로 바꾸는 방식은 업무 중 보고서를 다듬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커튼을 열었다.

 

“나중에 붙인 말이잖아.”

“아니야. 원래 그 뜻이었어.”

“네가 한 말은 다 기억해. 첫 키스라고 했지, 사귀고 나서는 안 붙였어.”

“오빠 진짜 피곤하게 산다.”

“거짓말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사진 선택 화면 앞에 선 스텔라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네 장의 결과를 확인했다. “아, 이거 나 찐빵처럼 나왔어.” 첫 번째 사진 속 웃는 얼굴을 확대했다가, 두 번째 사진에서 놀라 굳은 자신을 보고 또 웃었다. 세 번째 사진에서는 서이현이 유난히 잘생겼다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마지막 사진에서는 입술을 만지며 “이거 엄마한테 보여주면 기절하겠다”고 했다. 서이현은 그녀의 옆에서 모든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못 들은 척했다. 스텔라가 선택한 프레임이 인화되는 동안 따뜻한 기계음이 들렸고, 잠시 후 같은 사진 두 장이 출력구로 미끄러져 나왔다.

 

스텔라는 한 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서이현은 사진을 받아 네 컷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첫 번째에는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스텔라가, 두 번째에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얼굴이, 세 번째에는 카메라조차 잊고 서로를 보는 두 사람이, 마지막에는 입술을 물었다 놓은 직후의 미묘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자신의 어깨가 전부 스텔라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의식하지 못한 자세였다.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그녀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이거 잘 나왔다.”

 

스텔라가 자신의 사진을 휴대전화 옆에 대보며 말했다.

 

“나중에 부대에서 연애하는 거 오픈하면 배경화면으로 써야지.”

 

서이현의 시선이 사진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오픈?”

“계속 숨길 수는 없잖아.”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서이현에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직 철저히 통제해야 할 비밀이었다. 자신의 진급과 그녀의 경력, 같은 부대 상관과 부하라는 위치, 설명할 수 없는 과거까지. 공개할 이유보다 숨겨야 할 이유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스텔라의 머릿속에서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이 사진을 배경으로 쓸 미래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미래에서 자신은 여전히 그녀 곁에 있었다. 잠시 후가 아니라, 오늘 밤이 아니라, 관계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어느 훗날까지.

 

서이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스텔라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녀가 작은 소리를 내며 거울 쪽으로 밀려났다. 사진 부스 바깥에는 전신 거울이 있었고, 그 앞에서 두 사람의 몸이 하나의 실루엣처럼 겹쳤다. 스텔라는 그의 팔 안에 갇힌 채 거울 속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좀 있어. 정신 사나우니까.”

 

그는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얹었다. 거울 안에는 연녹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허리를 짙은 네이비 니트 차림의 남자가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먼저 보였다. 나이도, 인상도, 둘이 살아온 방식도 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의 그림처럼 완성되어 있었다. 스텔라는 거울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사진 찍을까?”

“찍어.”

“오빠도 거울 봐.”

“싫어.”

“그럼 어디 봐?”

“너.”

 

스텔라는 잠시 거울 속 그의 눈과 마주쳤다. 서이현은 정말로 카메라도, 거울 속 자신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각도를 바꾸느라 이리저리 움직이자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더해졌다.

 

“오빠 군인 안 했으면 연예인 했겠다.”

“쓸데없는 소리.”

“진짜로. 잘생겼잖아.”

 

스텔라는 뒤로 조금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품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내 얼굴 너무 크게 나와.” 하며 투덜거리면서도 화면 속 자신들을 여러 장 찍었다. 웃는 얼굴, 그의 턱 아래에 머리를 기대는 얼굴, 거울 너머로 서이현을 바라보는 얼굴. 서이현은 번번이 카메라 대신 스텔라를 보았다. 그녀가 예쁘게 나오는 방법을 연구하느라 눈을 가늘게 뜨거나, 입술을 살짝 내밀거나, 갑자기 활짝 웃는 순간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군대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표정들이었다. 자신이 알던 정 소위는 카메라 앞에서도 정면을 바라보고 입꼬리를 규정된 만큼만 올리는 여자였다. 지금 거울 안의 스텔라는 사진 하나를 찍기 위해 몸을 기울이고 웃음을 터뜨리며, 제 품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그녀에게서 빼앗아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 밝은 부분을 혼자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다 찍은 스텔라는 만족스럽게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이 다음엔 뭔가요, 서른아홉?”

 

이번에는 서이현도 멈추지 않았다. 대신 깍지 낀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 옷 사러 가야지.”

“아, 맞다.”

“네가 골라준다며.”

 

그는 몸을 숙여 스텔라의 귀에만 들릴 만큼 낮게 덧붙였다.

 

“오늘 밤 내가 뭘 입고 있었으면 좋겠는지 신중하게 골라. 네가 벗기게 될 옷이니까.”

 

스텔라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서이현은 이번만큼은 의도를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의 니트 소매를 만져보며 말했다.

 

“그러면 벗기기 편한 걸 골라야 하나?”

 

서이현의 걸음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스텔라는 여전히 옷의 실용성을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단추 많은 셔츠는 귀찮겠다. 니트가 낫겠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알아들은 것인가, 또 엉뚱하게 해석한 것인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스텔라는 이미 남성복 매장 쪽으로 쪼르르 걸어가고 있었다. 매장에 들어서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행거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셔츠를 꺼내 서이현의 어깨에 대보고, 색이 다른 니트 두 장을 양손에 들어 얼굴 가까이 비교했다. 매장 직원이 다가오자 서이현은 손짓 하나로 물렸다. 지금은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텔라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고르는지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빠 사복은 집에서 입는 트레이닝복밖에 제대로 못 봐서 뭘 좋아할지 모르겠네.”

“아무거나.”

“아무거나 말고.”

“네가 고른 거면 뭐든.”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지나치게 순순한 대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이현은 표정을 굳혔지만 이미 늦었다. 스텔라는 잠시 멈춰 그를 바라보더니 기분 좋은 듯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또 신경을 간질였다. 이윽고 그녀는 짙은 네이비색 스웨터를 그의 가슴에 대보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네이비잖아. 맨날 네이비, 블랙, 차콜밖에 안 입잖아.”

“편하니까.”

“재미없어.”

“옷이 재미있을 필요가 있나.”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행거로 향했다. 한참을 살피던 끝에 꺼낸 것은 새하얀 카라 니트였다. 부드러운 소재에 목선을 단정하게 감싸는 디자인으로, 서이현이 스스로 골랐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옷이었다. 그는 흰 니트와 그것을 들고 기대에 찬 눈으로 서 있는 스텔라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흰색?”

“오빠 밝은 옷 입은 거 한 번도 못 봤어.”

“때 타.”

“빨면 되지.”

“관리 귀찮아.”

“내가 빨아줄게.”

 

그 말은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서이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흰 옷을 사주고, 더러워지면 제 손으로 빨아주겠다는 말. 함께 사는 사람에게나 할 법한 사소한 약속을 스텔라는 너무 쉽게 했다. 그녀에게는 그저 관리가 귀찮다는 남자친구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었겠지만, 서이현에게는 낯선 생활의 한 장면처럼 들렸다. 관사 세탁기 안에서 자신의 흰 니트가 그녀의 옷과 함께 돌아가는 풍경, 마른 옷을 개며 왜 이렇게 험하게 입었느냐고 잔소리하는 목소리. 그런 장면을 상상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스텔라의 손에서 니트를 낚아챘다.

 

“입어보고 나올게.”

“진짜?”

“네가 골랐으면 네가 봐야 할 거 아니야.”

 

탈의실로 들어가기 전 그는 그녀의 귀 가까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판단해. 오늘 밤 이 흰 옷을 더럽히는 게 좋을지, 깔끔하게 벗기는 게 좋을지.”

 

스텔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흰 옷은 얼룩 묻으면 빨기 어려워.”

 

서이현은 그대로 굳었다. 잠시 후 커튼을 닫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예상했어야 했다. 이 여자는 농밀한 은유를 세탁 문제로 바꾸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니트를 갈아입고 거울을 보자 자신도 낯설었다. 새하얀 색이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을 조금 눌러주었지만, 몸에 맞게 떨어지는 소재는 오히려 넓은 어깨와 가슴, 팔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괜히 손목 끝을 잡아당겼다. 스텔라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지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으나, 커튼을 열기 전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커튼을 열자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동그래졌다.

 

“오.”

“어때.”

 

스텔라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그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부드러운 니트 아래의 단단한 감촉을 확인하듯 두 번쯤 콕콕 찔렀다.

 

“오빠 몸 좋다.”

 

서이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근육이 다 드러나는데?”

 

칭찬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분석적이었다. 스텔라는 어깨에서 가슴, 팔로 이어지는 선을 거리낌 없이 훑어보았다. 수치심이나 유혹은 없었다. 새로 지급된 장비의 성능을 점검하는 사람처럼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 때문에 오히려 서이현 쪽이 먼저 당황했다.

 

“그렇게 잘 보이나.”

 

그는 팔을 찌르던 손을 붙잡아 스텔라를 거울 앞으로 끌고 갔다. 등 뒤로 바싹 붙어 서서 그녀를 자신과 거울 사이에 가둔 뒤, 잡은 손을 제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 아래로 니트의 부드러운 감촉과 단단한 근육,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그럼 더 잘 보이게 확인해야지.”

“뭘?”

“만져봐.”

 

스텔라는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움직였다. 가슴 부분의 천을 몇 번 문지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질 좋다.”

“...뭐?”

“까슬거리지도 않고 부드러워. 이거로 사자.”

 

그녀의 관심은 끝까지 니트의 재질에 있었다.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고도 심장박동이나 몸에는 아무런 감상이 없고, 원단의 촉감만 충실하게 평가했다. 서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화를 내기에는 지나치게 어처구니없고, 웃기에는 속에서 무언가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스텔라의 손을 떼어내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

 

목소리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이거로 사.”

 

그는 탈의실 안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흰 니트를 벗는 동안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패배한 기분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장 계산대로 향해 옷과 카드를 내밀었다. 포장된 쇼핑백은 스텔라에게 주지 않고 직접 들었다.

 

“가자.”

 

그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스텔라가 옷을 골라준 것에 기뻐하는지, 계산대에서부터 줄곧 웃고 있었다.

 

“오빠 마음에 들어?”

“네가 사라며.”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 봐도 되는데.”

“됐어. 이거 입을 거야.”

“언제?”

“네가 보러 오는 날.”

 

그 말에는 스텔라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알아들었는지, 이번에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손목을 잡힌 채 그의 옆으로 더 가까이 붙어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백화점 출구로 향하던 중, 스텔라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그녀는 초록색 간판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밝히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왜.”

“나 그전에 올리브영만 한 번 들르면 안 돼?”

 

서이현은 자신이 잡고 있던 손목과, 다른 손으로 소매를 붙들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스텔라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흰 니트를 벗기느니 더럽히느니 말하던 분위기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의 화장품 가게였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십 분.”

“진짜?”

“십 분 안에 사서 나와. 일 분이라도 늦으면 두고 간다.”

“알았어!”

 

스텔라는 카드를 들고 매장 안으로 사라졌다. 서이현은 입구 옆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그녀가 향수나 화장품, 필요 없는 작은 물건을 잔뜩 사 들고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준 카드를 얼마나 거리낌 없이 쓰는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칠 분 만에 돌아온 스텔라의 손에는 쇼핑백조차 없었다. 그녀는 작은 물건 하나와 그의 카드를 함께 내밀었다.

 

“내 돈으로 샀어.”

“왜.”

“오빠 카드로 사면 선물이 아니잖아.”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남성용 립밤이 놓여 있었다. 색은 거의 없고 보습력이 좋은 제품이었다.

 

“오빠 자꾸 입술 깨물잖아. 다 터.”

 

서이현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입술로 향했다. 생각에 잠기거나 짜증이 날 때마다 아랫입술 안쪽을 깨무는 버릇은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텔라는 보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순간에 입술을 깨무는지, 그 때문에 살이 트는 것까지. 백화점에서 옷을 골라주는 동안에도, 영화 속에서 울고 있는 동안에도, 삼 년 동안 그의 옆에 붙들려 지내는 동안에도 그녀는 그런 사소한 습관을 기억해두었다. 서이현은 립밤과 카드를 말없이 받아 들었다. 차가운 플라스틱 케이스가 손안에서 이상할 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스텔라가 지켜보는 앞에서 뚜껑을 열어 입술에 발랐다. 은은한 민트 향이 퍼졌다. 색도 광택도 거의 남지 않아 그의 취향에 정확히 맞았다.

 

“어때?”

“괜찮네.”

“그게 끝?”

 

조금 전 자신이 들었던 질문과 똑같았다. 서이현은 립밤을 바지 주머니 가장 안쪽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목이 아니라 손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의 거친 힘과 달리 손가락을 감싸는 움직임은 눈에 띄게 부드러웠다.

 

“가자.”

“어디로?”

“밥 먹어야지.”

 

그는 먼저 걸음을 옮기다 스텔라가 따라오지 않자 잡은 손을 가볍게 당겼다.

 

“배고플 거 아니야.”

 

스텔라는 두 걸음 만에 그의 옆으로 붙었다. 서이현은 정면만 바라보고 걸었으나 주머니 속 립밤의 모서리를 계속 손끝으로 만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사진이 지갑 안쪽에 들어 있었고, 자신이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흰 니트가 다른 손에 들려 있었으며, 입술에는 스텔라가 고른 민트 향이 남아 있었다. 데이트가 시작된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그의 몸과 소지품 곳곳에 그녀가 선택한 것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배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무엇이 어울리는지 골라주고, 터진 입술을 걱정하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 날짜를 적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방식은 그가 사용해온 어떤 명령이나 협박보다도 자연스럽게 서이현의 삶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잡은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스텔라가 옆에서 “그래서 저녁 메뉴는 뭔데, 서른아홉 님?” 하고 웃었다. 이번에는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나지 않는 자신이 더 문제였다. 서이현은 대답 대신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겨 어깨가 닿도록 붙인 채 백화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입술에 남은 민트 향이 바람을 들이마실 때마다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백화점의 환한 조명을 등지고 밖으로 나오자 저녁의 공기가 생각보다 서늘했다. 낮 동안 유리벽과 아스팔트에 갇혀 있던 열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고, 강남의 거리는 낮과는 다른 종류의 빛으로 번쩍였다. 간판과 전광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사람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스텔라의 연녹색 원피스도 잠깐씩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가 돌아왔다. 서이현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백화점 안에서는 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한 것처럼 보였고, 횡단보도에서는 길을 건너기 위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어떤 핑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옮길수록 깍지 낀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한 손에는 스텔라가 골라준 흰 니트가 든 쇼핑백이 있었고, 바지 주머니에는 립밤이, 지갑 안쪽에는 늑대 귀가 그려진 폴라로이드와 네컷사진이 들어 있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자신의 몸과 소지품 곳곳에 스텔라가 남긴 것들이 자리를 잡았다. 명령도 허락도 없이 들어온 흔적들이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척하기에는, 그는 아까부터 주머니 속 립밤의 모서리를 몇 번이나 만지고 있었다.

 

“그래서 서른아홉 님이 정한 저녁 메뉴는 뭔가요?”

 

스텔라가 그의 옆에서 큭큭 웃으며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빠’였던 호칭이 다시 숫자로 변했다. 서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잡고 있는 손만 한 번 세게 쥐었고, 스텔라는 그 경고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몰라도 입꼬리를 더 크게 올렸다. 그는 원래 오늘 저녁을 호텔 안 레스토랑이나 예약이 필요한 고급 식당에서 먹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가진 사람인지, 무엇을 줄 수 있는 남자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고도 알게 해주는 장소. 군복과 계급장을 벗은 뒤에도 관계의 우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립밤 하나로 자신의 가장 사소한 버릇을 들킨 지금은 그런 과시가 우스워졌다. 스텔라는 그의 카드보다도 그가 깨문 입술을 보았고, 비싼 음식보다 콩국수를 좋아한다고 무심코 말했던 기억을 더 소중하게 다루었다. 돈으로 압도하는 일은 쉽지만,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 습관을 기억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엇을 내보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려한 대로를 벗어나 조금 더 안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리 외벽과 명품 매장이 이어지던 풍경이 점점 낡은 간판과 작은 식당들로 바뀌었다. 기름 냄새와 뜨거운 육수 냄새가 뒤섞여 골목을 채웠고, 오래된 가게 앞에는 퇴근한 직장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스텔라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손에 이끌리는 방향을 따라가면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러다 낡은 간판 아래에 적힌 세 글자를 발견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우와.”

 

서이현이 돌아보기도 전에 스텔라는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도 앱을 켜 저장 목록을 열어 보이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랐다. 화면 위에는 ‘오빠랑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고, 느낌표 세 개 아래 가장 첫 번째로 저장된 장소가 지금 눈앞의 식당이었다.

 

“나 여기 와보고 싶었는데.”

 

스텔라의 눈이 금세 반짝였다. 우연이 반가워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이 원하는 곳을 알아서 골랐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화면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는 스텔라가 콩국수를 좋아한다는 말 하나만 기억했고, 이 근처에서 유명한 곳을 골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오래전부터 자신과 함께 오고 싶은 장소로 같은 곳을 저장해두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유심히 관찰한 만큼, 그녀 역시 자신의 옆에서 두 사람의 미래를 조금씩 상상해온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괜히 빨라졌다.

 

“들어가자. 자리 없겠다.”

 

그는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황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마침 구석의 작은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었고, 서이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의자를 빼 앉았다. 스텔라는 맞은편에 폭 앉으며 여전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신기하다. 여기 저장한 지 오래됐는데.”

“그만 보고 주문이나 해.”

“메뉴 선택권 있나요, 서른아홉 님?”

 

서이현은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여기까지 끌고 온 사람이 누군데 네게 선택권이 있을 것 같나.”

 

그는 메뉴판을 열어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직원을 불렀다.

 

“콩국수 하나, 닭칼국수 하나. 접시만두 하나 주십시오.”

 

주문은 몇 초 만에 끝났다. 스텔라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서이현은 의자에 기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콩국수. 난 닭칼국수. 만두는 같이. 이의 있나, 정 소위?”

“스텔라였다가, 스물일곱이었다가, 이제는 정 소위야?”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서이현은 그 모습을 잠시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검지로 한쪽 뺨을 꾹 눌렀다. 부드러운 살이 손가락 아래로 들어갔다가, 그가 손을 떼자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불만인가?”

“갑자기 말투가 서이현 대위가 됐잖아.”

“원래 서이현 대위였는데.”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난처럼 뺨을 누르던 손가락이 턱선을 따라 내려가 턱 끝을 잡았다. 스텔라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의 눈이 순식간에 서늘해진 것을 알아챈 듯했다.

 

“내가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있나?”

 

질문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다정하고 평범한 남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었고, 그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곁에 붙잡아둔 사람이었으며, 지금도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오늘 몇 번 웃었고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그것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스텔라는 어쩌면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서이현은 그녀의 턱을 잡은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내가 달라진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라기보다, 네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냐는 경고였다.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뜨거운 김이 두 사람 사이로 피어올랐고, 서이현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먹어. 식으면 맛없다.”

 

스텔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제 앞의 콩국수로 시선을 내렸다. 평소라면 분위기를 살피며 먼저 말을 고르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데이트라는 이름이 그녀를 조금 대담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입술을 비죽인 채 젓가락을 들어 면을 한가득 집었다. 그리고 국물이 충분히 식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입에 넣었다.

 

“……아뜨뜨.”

 

입술 사이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상보다 뜨거웠는지 미간이 확 찌푸려졌고, 눈가에는 금세 옅은 물기가 맺혔다. 서이현은 닭칼국수 면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멈췄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상기시키려 턱을 붙잡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혀를 데고 낑낑거리는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걸 그냥 먹나. 멍청하긴.”

 

그는 찬물 주전자를 들어 스텔라의 컵을 채운 뒤 앞으로 밀어주었다. 스텔라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혀끝을 입술 사이로 조금 내밀어 식혔다. 서이현은 그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떼고, 접시만두 하나를 집어 자기 앞접시에 올렸다. 젓가락으로 반을 갈라 뜨거운 김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스텔라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면서도 굳이 묻지 않았다. 김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그는 반쪽을 그녀의 접시에 놓았다.

 

“이거나 먹어. 식혀놨으니까.”

“국수는?”

“나중에 식으면 먹고.”

 

스텔라는 만두를 받아 입에 넣었다. 방금 전 혀를 데고 눈가가 붉어졌던 것도 잊은 사람처럼 금세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이현은 그 얼굴을 보며 자신이 조금 전 던졌던 질문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느꼈다. 내가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있나. 그렇다. 없었다. 그는 여전히 상대를 위협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키며, 관계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여자가 혀를 데면 물을 따라주고, 만두를 반으로 갈라 식혀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둘 중 무엇이 본질인지 묻는다면 그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둘 다 자신이었고, 스텔라 앞에서만 그 모순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뿐이었다.

 

만두를 삼킨 스텔라는 턱을 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렁거리던 눈이 금세 다시 밝아져 있었다.

 

“나 첫 데이트니까 오빠한테 이것저것 물어봐도 돼?”

 

첫 데이트. 그 단어에 서이현의 젓가락이 잠깐 멈췄다. 그는 오늘 내내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삼 년 동안 둘이 함께한 식사와 술자리, 밤늦게 관사에 불러놓고 보고서를 고치던 시간, 명분 없이 차에 태워 어딘가로 데려갔던 순간들이 그녀에게는 데이트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당연했다. 그때는 연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서이현의 기억 속에서는 그 모든 날이 이미 그녀와 엉겨 있었다. 스텔라가 관계의 시작을 오늘로 다시 정하는 것이 괜히 억울했다.

 

“질문에도 허락이 필요한가, 정 소위? 묻고 싶으면 묻는 거지.”

“정 소위 말고 스텔라라고 불러. 아니면 평소처럼 야, 라고 하든가.”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닭칼국수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스텔라는 잠시 고민하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가 곧 배싯 웃었다.

 

“내 어디가 좋았어?”

 

숟가락이 그릇 위에서 멈췄다. 서이현은 질문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이유. 지극히 평범한 연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일 것이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다정해서, 함께 있으면 편해서. 그러나 그가 스텔라를 원하게 된 감정의 시작은 그런 문장들로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 본 순간 그는 그녀가 자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능력, 흔들리지 않는 태도, 자신의 명령을 합법으로 바꿀 수 있는 머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자신 앞에서만 무너질 가능성. 그것이 필요와 흥미와 욕망으로 뒤엉켜 어느 순간 좋아한다는 감정의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처음부터 네 전부를 쥐고 싶었다고? 네가 내 명령을 따르면서도 가끔 이렇게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날 흔드는 모습이 좋다고? 그는 시선을 피하듯 젓가락으로 그릇 안의 면을 무의미하게 저었다.

 

“그런 걸 왜 묻지.”

“그냥 궁금하니까.”

“그냥.”

 

스텔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은 대답 아니야.”

“좋아하는 데 이유가 꼭 있어야 하나.”

“그럼 오빠는 내가 오빠를 언제, 왜 좋아했는지 안 궁금해?”

 

서이현은 다시 손을 멈췄다. 그 질문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스텔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 삼 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켰고, 부당한 요구를 따랐으며, 지금은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손을 잡고 있었다. 그에게 그녀의 감정은 이미 결정된 결과였다. 자신이 그녀를 선택했으니 그녀도 자신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오만하고 단순한 질서. 그러나 언제부터, 왜라는 근원은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는 팔짱을 풀고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얹고 스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안 궁금한데.”

 

거짓말이었다. 말을 꺼낸 순간부터 궁금해졌다. 자신의 어떤 면이 이 여자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지위인지, 능력인지, 가끔 흘러나온 배려인지,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다른 무엇인지.

 

“네가 날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왜 당연해?”

“내가 널 선택했으니까.”

 

스텔라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고 뭐라 할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가.”

 

서이현은 접시만두에서 남은 반쪽을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중요한 건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 재수 없다고 생각했으면 진작 내 곁을 떠났을 테니까.”

 

스텔라는 양 볼이 다시 빵빵해질 만큼 만두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서이현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

 

“그래서.”

“뭐가?”

“언제부터였는데.”

“안 궁금하다며.”

“네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들어주는 거야.”

“또 거짓말.”

 

스텔라는 만두를 삼킨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웃음이 조금 사라진 얼굴로 과거의 한 장면을 찾는 듯 시선을 테이블 한쪽에 두었다. 그러다 다시 서이현을 바라보았다.

 

“임관식 날.”

 

그 한마디에 서이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스텔라의 임관식. 하얗고 빳빳한 정복들이 줄지어 서 있던 날. 수많은 신임 장교들 사이에서도 유독 꼿꼿하게 서 있던 여자. 긴장과 기대가 뒤섞였음에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애쓰던 얼굴. 그는 그날 그녀를 처음 보았다. 정확히는 알아보았다. 자신의 손에 들어오면 누구보다 쓸모 있을 사람을 발견한 지휘관의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바라보았다는 사실도 기억했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훨씬 길게.

 

“그때 오빠가 나를 유독 오래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나도 봤잖아.”

 

서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눈에 반했다기보다는…… 이상했어. 왠지 이 사람이랑 오래오래 얽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예감처럼.”

 

스텔라는 말끝에 작게 웃었다.

 

“예감?”

 

서이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역시 그날 그녀를 보며 이 여자를 자신의 곁에 두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것을 선택이라고 여겼고, 그녀는 예감이라고 불렀다. 누가 누구를 먼저 발견했는지, 누가 누구의 덫에 들어간 것인지 갑자기 모호해졌다. 그는 그녀의 약점을 손에 넣고 의도적으로 가까이 끌어당겼지만, 스텔라는 처음부터 그와 오래 얽힐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만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고 믿었던 관계의 시작이 사실은 서로의 시선이 동시에 멈춘 순간이었다는 사실이 이상한 패배감을 안겼다.

 

“그래서.”

 

서이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예감이 맞았어?”

 

스텔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음식과 낡은 식당 내부, 서이현이 제게 따라준 물과 식혀준 만두, 자신의 손등에 남은 그의 손자국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이거 보면 알잖아.”

 

작게 웃는 얼굴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은 그냥 좋더라도, 나중에라도 생기게 만들어줄게. 나를 좋아하는 이유.”

 

서이현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이유를 만들어주겠다. 자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대신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씩 남기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스텔라는 이미 오늘 하루 동안만도 너무 많은 이유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연녹색 원피스와 아껴온 향수, 빼곡한 일정표, 늑대 귀가 그려진 사진, 흰 니트, 립밤. 그리고 자신이 고른 식당을 오래전부터 함께 오고 싶은 곳으로 저장해둔 일까지. 그녀는 그것들이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서이현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 스텔라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만들어주겠다고?”

“응.”

“이미 충분한데.”

 

스텔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그 반응을 보며 순간 더 다정한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네가 웃는 게 좋다거나, 나를 기억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그에게 사랑은 언제나 가장 어두운 방식으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예쁜 문장으로 포장하는 대신, 익숙한 잔인함을 골랐다.

 

“내 앞에서 네가 어떤 표정을 짓든, 결국 내 말 한마디에 따르는 것. 날 원망하면서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 모든 순간이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야.”

 

말을 마친 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신이 우위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만들어주겠다는 새로운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이미 자신이 가진 소유욕을 사랑의 근거로 제시했다. 스텔라라면 상처받거나 적어도 잠깐은 표정이 굳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스텔라는 별다른 반응 없이 콩국수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잔인한 말을 들었는데도 면을 입안 가득 넣고 냠냠 씹었다. 서이현은 어이가 없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장 날카로운 고백이 콩국수 앞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사라졌다. 상처받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무시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야.”

“왜?”

“아무렇지도 않아?”

“오빠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시키려 애썼고, 스텔라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의 어두운 감정은 그녀에게 새삼스러운 경고가 아니었다. 이미 삼 년 동안 곁에서 보고 견뎌온 것이었다.

 

“그리고.”

 

스텔라는 국수를 삼킨 뒤 입술을 닦았다.

 

“지금 이유가 그거뿐이어도 상관없어. 내가 다른 이유도 생기게 할 거니까.”

 

서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이길 수가 없었다. 힘으로 누르면 그 아래에서 너무 쉽게 웃었고, 잔인한 말을 던지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 삼켰다. 자신이 그녀를 완벽히 길들였다고 믿어왔지만, 정작 이 관계에서 계속 예상 밖으로 끌려다니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는 결국 포기한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고 닭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스텔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양 볼을 부풀렸고, 둘 사이의 위험한 대화는 뜨거운 국물과 식기 부딪히는 소리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밤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네온사인이 젖은 듯 번들거렸고, 골목마다 음식과 담배 냄새가 엉켜 있었다. 서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스텔라보다 반걸음 앞서 걸었다. 조금 전 식당에서 나눈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임관식 날, 오래 얽힐 것 같았다는 예감, 좋아하는 이유를 만들어주겠다는 말. 그는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필요와 욕망, 소유와 애착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고, 구분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스텔라는 오늘 하루 내내 그 경계를 하나씩 흐리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 립밤을 만지작거리다 뒤를 돌아보았다. 몇 걸음 뒤에서 스텔라는 주변 간판을 구경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느긋해 보여 그는 자신의 차가 있는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쪽.”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붙었다. 그러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갑자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근데 잠깐만.”

 

그녀가 가리킨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어두운 골목이었다. 서이현은 스텔라의 얼굴과 골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거리의 불빛을 구경하던 밝은 표정은 사라져 있었고, 그녀의 눈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스텔라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소매를 잡은 채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누군가가 자신을 이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서이현도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고, 벽돌과 먼지의 서늘한 냄새가 짙어졌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스텔라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 서이현을 마주 보고 선 그녀가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담배였다.

스텔라는 아무 말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우리 오빠 식후땡할 시간이잖아.”

 

서이현은 손안에 놓인 담배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사소해서 자신도 의식하지 않고 반복하던 습관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담배를 찾는 것. 오늘은 데이트 중이라 일부러 꺼내지 않았고, 그녀 앞에서 피워도 되는지 고민조차 하기 싫어 참아왔던 행동. 그런데 스텔라는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꺼내기도 전에 준비해두었다.

 

그는 천천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스텔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오늘 자신에게 준 것들은 전부 값이 크지 않았다. 사진 한 장, 립밤 하나, 담배 한 개비. 그러나 이상하게 전부 자신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왔다. 돈이나 권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자신의 습관을 지켜본 시간, 기억해둔 마음, 필요할 순간을 미리 짐작한 관심. 서이현의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런데, 정 소위.”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숨결이 닿을 만큼 거리가 좁아졌다.

 

“규칙을 잊었나?”

“무슨 규칙?”

“내가 담배를 물면.”

 

그는 입에 문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너도 물어야지.”

 

스텔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가방에서 자신의 담배를 꺼냈다. 망설임 없이 입술 사이에 물고, 그의 담배 끝과 제 담배 끝을 맞댔다. 두 개의 담배가 어둠 속에서 서로를 향해 기울었다. 스텔라는 라이터를 켰다. 작은 불꽃이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을 밝히고, 곧 두 담배 끝을 동시에 삼켰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붉은 불씨가 살아났고, 그 불이 맞닿은 끝을 따라 서이현의 담배에도 옮겨붙었다. 한 번의 호흡으로 두 담배에 불이 붙었다. 스텔라는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하얀 연기가 어둠 속에서 두 사람 사이를 흐렸다가 사라졌다. 담배를 문 채 그녀가 배싯 웃었다.

 

“오빠랑 데이트해서 너무 좋았어. 오늘.”

 

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자 씁쓸한 연기가 폐 안쪽까지 내려갔다. 그녀가 말한 좋았다는 감상이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잔인했다. 그는 오늘 하루 내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고, 질투하고, 당황하고, 몇 번이나 그녀에게 말려들었다. 그런데 스텔라에게 오늘은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사진을 찍고, 옷을 골라주고,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은 좋은 첫 데이트였다. 그는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흰 연기가 스텔라의 얼굴 앞으로 퍼졌다.

 

“좋았다고?”

 

목소리가 연기처럼 낮게 깔렸다.

 

“오늘 밤은 이제 시작인데.”

 

스텔라는 눈을 한 번 깜빡였지만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서이현은 담배를 든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붙잡았다. 엄지 끝에 묻은 아주 미세한 재가 하얀 뺨에 옅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그 작은 오점을 바라보며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흔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사소했지만, 오늘 그녀가 자신에게 남긴 것들 역시 전부 그런 식이었다. 작고, 지워질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남는 것들.

 

“너무 이른 감상 아닌가, 스텔라.”

 

그는 그녀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직 차까지 가야 하잖아.”

 

 


 

 

그 말을 끝으로 서이현은 스텔라의 턱을 놓았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담뱃재가 묻힌 흔적이 옅은 회색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일부러 닦아주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스텔라가 자신의 지갑과 주머니, 입술과 옷장에 하나씩 흔적을 심어놓았듯이, 자신도 그녀의 피부 위에 무언가를 남겨두고 싶었다. 유치하고도 원초적인 충동이었다. 스텔라는 그 흔적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담배를 다시 입술 사이에 물었다. 붉은 불씨가 깊은 호흡을 따라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흰 연기가 그녀의 얼굴 앞으로 얇게 피어올랐다. 조금 전 좋았다고 말할 때와 똑같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 평온함이 서이현에게는 늘 문제였다. 자신은 그녀가 내뱉은 말 하나, 눈길 하나에 속이 뒤집히고 생각이 꼬이는데, 정작 그 모든 일을 벌인 사람은 언제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오늘을 위해 아껴온 향수를 뿌렸다고 말할 때도, 자신과 오래 얽힐 것 같았다고 고백할 때도, 앞으로 좋아할 이유를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할 때도 그랬다. 스텔라는 사람의 심장을 쥐어뜯는 문장을 골라놓고도, 그것을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말처럼 담담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상대가 그 밑에서 어떻게 망가지는지 전혀 모른 채 다음 일정으로 넘어갔다.

 

서이현은 담배를 입에서 빼 마지막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발치에 담배를 떨어뜨리고 구두 밑창으로 불씨를 짓밟자 붉은 빛이 짧게 번졌다가 완전히 꺼졌다. 스텔라도 그를 따라 담배를 비벼 껐다. 좁은 골목에 담배 냄새와 그녀의 향수, 오래된 벽에서 배어 나오는 눅눅한 먼지 냄새가 뒤섞였다. 그는 스텔라가 제 옆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골목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가벼운 구두 소리가 곧 따라붙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왔던 여자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반걸음 뒤를 걸었다. 연인이 된 뒤에도 스텔라는 이상한 순간에 부관의 자리를 되찾았다. 앞장서는 것은 서이현이고, 자신은 그가 정한 방향을 따른다는 것을 몸이 먼저 기억했다. 그는 그 익숙한 발소리를 들으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가락 끝에 립밤의 모서리가 걸렸다. 지갑 속에는 사진이, 다른 손에는 흰 니트가 들려 있었다. 오늘의 스텔라는 자신이 가진 물건들 속에 지나치게 많이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그의 속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주차장은 건물 뒤편에 있었다. 차량 몇 대만 듬성듬성 세워진 공간은 거리와 달리 고요했고,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깜빡였다. 서이현이 리모컨 키를 누르자 멀리 세워둔 검은색 세단의 등이 짧게 빛났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대신 운전석으로 곧장 향했다. 스텔라도 익숙하게 반대편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두 개의 문이 거의 동시에 닫히며 바깥의 소음이 단절되었다. 좁고 어두운 실내에 두 사람의 호흡만 남았다. 시동은 아직 걸리지 않았고, 계기판도 꺼진 채였다. 주차장의 희미한 조명이 앞유리를 통해 들어와 스텔라의 얼굴 한쪽만 흐릿하게 밝혔다. 뺨에는 여전히 그가 묻혀놓은 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이현은 쇼핑백을 뒷좌석으로 던져놓고 몸을 돌렸다. 운전대를 잡아야 할 손이 자연스럽게 조수석 쪽으로 뻗었다.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이 있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 영화 이야기를 꺼내고, 옷을 벗기겠다는 말에는 단추의 개수부터 따지고, 가슴 위에 손을 올려주었더니 니트의 재질을 평가했다. 매번 분위기는 스텔라가 이해하지 못한 한마디에 맥없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시도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가 아직 남아 있었고, 어쩌면 끝까지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을 직접 무너뜨려보고 싶은 욕망이 더 커져 있었을지도 몰랐다. 차 안은 골목보다 훨씬 좁고 사적이었다. 그녀가 빠져나갈 방향도, 시선을 돌릴 다른 대상도 없었다. 오늘 밤 자신이 어디까지 참고 있었는지 이제는 그녀도 모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상체를 기울이자 두 좌석 사이의 공간이 단번에 사라졌다. 스텔라는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채 얌전히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놀라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골목에서 차에 가면 해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스텔라는 무슨 비밀스러운 선물을 준비한 아이처럼 배싯 웃었다. 서이현은 그 말의 의미를 자신의 방식대로 받아들였다. 차라는 밀폐된 공간, 오늘 밤을 아직 끝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 식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신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던 행동까지. 그녀가 아무리 연애에 둔해도 이 정도면 모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이 스텔라의 뺨 가까이 도달하기 직전, 차 안에 낯선 전자음이 울렸다.

 

연결되었습니다.

 

스텔라가 휴대전화를 차량 블루투스에 연결한 것이었다. 서이현은 뻗었던 손을 허공에 멈춘 채 굳었다. 곧이어 스피커에서 잔잔한 피아노 전주가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부르는 여성 보컬의 목소리가 어두운 차 안을 부드럽게 채웠다. 밤과 이별과 계절에 관해 노래하는 듯한 느리고 서정적인 곡이었다. 스텔라는 화면을 몇 번 누르더니 음량까지 적당한 크기로 조절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휴대전화를 컵홀더 옆에 내려놓았다. 서이현은 여전히 그녀에게 몸을 기울인 자세였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노래만 흘렀다. 피아노 뒤로 현악기가 조심스럽게 더해졌고, 여성의 목소리는 감상적인 고음으로 올라갔다. 스텔라는 스피커를 향해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서이현을 바라보았다. 기대에 찬 눈이었다. 이 노래를 들어보라는, 자신이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을 이제야 보여준다는 얼굴. 서이현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이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몸을 뒤로 물리며 운전석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무슨 광대극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골목에서 자신에게 차로 가면 해주겠다고 했던 것이, 플레이리스트였던 모양이다. 오늘을 위해 향수를 아껴 썼듯, 오늘을 위해 노래를 골라 모아둔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상상했던 모든 장면과 기대가 잔잔한 제이팝 한 곡에 밀려나 차 밖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이게 네가 준비했다는 건가?”

 

스텔라는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빠랑 차에서 같이 들으려고 플레이리스트 만들어왔어.”

 

그 말은 다정했다. 이 여자는 자신과 함께 듣고 싶은 노래를 골라왔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까지 데이트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서이현은 기뻐할 수 없었다. 차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그려놓은 장면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짧게 흘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정스텔라.”

“왜?”

“왜?”

 

서이현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되받았다.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스텔라는 자신이 고른 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듯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이 노래 별로야? 오빠가 일본 노래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

“노래가 문제가 아니야.”

“그럼 너무 잔잔해?”

 

그녀는 진지하게 다음 곡 목록을 넘겼다. 서이현은 그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 안쪽이 지끈거렸다. 방금 전까지 끓어오르던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도달할 곳을 잃은 채 짜증과 뒤엉켜 더 거칠어졌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군 작전 중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도 이 정도로 당황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가능한 경우를 계산했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예측했다. 그런데 스텔라는 매번 그의 상식 바깥으로 움직였다. 그녀를 삼 년 동안 가장 가까이 두었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다음 순간 무엇을 할지는 한 번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스텔라가 곡을 몇 개 넘기다가 문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해. 한국 발라드도 있어.”

 

서이현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뭐?”

“오빠 노래 취향이 뭔지 몰라서 여러 개 섞어놨어. 일본 노래 싫으면 한국 노래로 틀게.”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지금 자신이 문제 삼는 것이 음악 장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좁은 차 안에서 자신이 어떤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골목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몸을 기울여 어디에 손을 뻗었는지 전부 보고도 결론은 한국 발라드였다. 서이현은 아무 말 없이 오디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잔잔한 여성의 목소리가 한 음절 중간에서 갑자기 잘렸다. 차 안으로 무거운 정적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껐어?”

“내 노래 취향?”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몸을 돌려 다시 스텔라 쪽으로 기울였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느긋한 기대가 없었다.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허를 찔린 사람의 피로와, 끝내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를 어떻게든 이해시키고 싶은 집요함이 눈에 어려 있었다. 스텔라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기도 전에 그는 턱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내 취향이 뭔지 아직도 몰라?”

“노래?”

“정스텔라.”

 

풀네임이 낮게 떨어졌다. 그는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뜨거워진 숨이 입술 가까이에 닿았다.

 

“지난 삼 년 동안 내가 뭘 가르친 거지.”

 

스텔라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모든 우회와 은유를 포기했다. 이 여자에게는 돌려 말하는 것이 통하지 않았다. 흰 옷을 더럽히겠다고 하면 세탁을 걱정했고, 직접 확인해보라고 가슴에 손을 얹어주면 원단을 만졌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가장 노골적인 문장뿐이었다.

 

“내 취향은 네가 골라온 노래가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입술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느리게 흘렀다.

 

“내 밑에서 네가 내지르는 소리. 그게 내 취향이야.”

 

차 안의 공기가 단숨에 무거워졌다. 이번에는 아무리 스텔라라도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뒤늦은 깨달음이나 당황, 두려움, 혹은 최소한 부끄러움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자신이 오늘 하루 내내 느꼈던 혼란을 조금이라도 돌려받고 싶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주 얌전히 대답했다.

 

“알았어.”

 

서이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한마디였다. 너무나 순진하고 명쾌한 긍정. 마치 영화 보는 동안 왼손을 내놓으라는 조건이나, 캐러멜 팝콘은 사지 말라는 취향을 들었을 때처럼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그가 방금 어떤 말을 했는지 이해하고 내놓은 반응이라기에는 얼굴이 지나치게 평온했다. 서이현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는 스텔라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스텔라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몸을 바르게 세웠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딸깍.

 

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그녀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출발하지 않는 서이현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는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이제 그가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주려면 차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서이현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차를 거칠게 몰면 무서워서 비명을 지를 테니, 그것을 듣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자신이 ‘밑에서’라고 말한 부분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스텔라의 머릿속에서는 그것마저 아마 내리막길이나 급커브와 관련된 표현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

 

서이현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분노를 넘어선 감정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패배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영화관에서는 스크린에 졌고, 비상구에서는 남은 일정에 졌으며, 탈의실에서는 니트의 재질에 졌다. 차 안에서는 플레이리스트에 졌고, 이제는 자신이 가진 가장 노골적인 언어마저 놀이기구의 비명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힘으로도, 말로도, 암시로도, 직접적인 표현으로도 이 여자의 순진함을 뚫을 수 없었다. 스텔라는 그의 세계가 작동하는 법칙을 번번이 무시했다. 아니, 애초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이마가 천천히 운전대 위로 내려갔다.

 

쿵.

 

둔탁한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스텔라가 놀라 몸을 조금 일으켰다.

 

“오빠?”

 

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뒷목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통증이 목덜미를 따라 내려와 어깨까지 당기는 것 같았다. 부대에서 수백 명을 통솔하고, 중령과 장군들 사이에서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내고, 법과 규정을 비틀어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온 남자가 스물일곱 여자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것도 제 손으로 가장 가까이 골라 붙여놓은 여자였다. 스텔라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괜찮아? 오늘 너무 돌아다녀서 피곤해?”

 

그 질문이 마지막이었다. 서이현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웃는 것인지, 한숨을 쉬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그는 한동안 그 자세로 있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모든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느낀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의 무표정이었다.

 

“그래.”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길 수가 없네.”

“뭘?”

“아무것도 아니야.”

 

서이현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해도 스텔라는 또 다른 뜻으로 알아들을 것이고, 그 결과 자신만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는 시동 버튼을 눌렀다. 낮은 엔진음과 함께 계기판이 밝아지고,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주차장 벽을 환하게 비췄다. 기어에 손을 올린 그가 앞을 바라보자 스텔라는 만족한 듯 좌석에 등을 붙였다. 정말로 이제 출발해 자신을 비명 지르게 해줄 것이라 믿는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옆을 한 번 바라보았다. 스텔라는 창밖의 밤거리를 구경하다가 아까 꺼진 음악이 아쉬운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제이팝을 틀 기세였다. 그는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덮어버렸다.

 

“틀지 마.”

“왜. 좋은 노래인데.”

“지금은 조용히 있어.”

“오빠가 내 비명 듣고 싶다며.”

 

서이현의 손이 운전대 위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스텔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안전벨트를 한 번 고쳐 맸다.

 

“빨리 가. 나 준비됐어.”

 

서이현은 전방을 보았다. 턱이 단단하게 굳었고, 뒷목의 근육이 다시 팽팽하게 당겼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결국 아주 낮게, 이를 악문 채 웃었다. 그것은 즐거움보다 체념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는 깨달았다. 오늘 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스텔라가 이해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남은 방법은 직접, 느리게, 이 여자가 절대로 다른 뜻으로 오해할 수 없도록 가르쳐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조수석의 스텔라는 그 결론조차 모른 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끊긴 제이팝의 후렴이었다.

서이현은 다시 한번 운전대에 이마를 박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액셀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