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아가타 쥰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눈동자도, 그 목소리도, 불현듯 고독의 그림자가 어리는 그 웃음진 얼굴도, 만약 어딘가에서 쥰세이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알 수 있으리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 -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그날 밤 집무실에는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는 것들이 많았다. 형광등은 수명을 다해 가는 사람처럼 몇 분에 한 번씩 희미하게 떨었고, 세 번째로 식어버린 커피에서는 이미 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유리창에 사무실 안쪽 풍경만 흐릿하게 비쳤다. 산처럼 쌓인 결재 서류와 모니터의 푸른 불빛, 벗어놓은 정모,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일을 처리하는 정스텔라의 뒷모습. 서이현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늦은 밤까지 부하를 붙잡아두는 것도, 정해진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뒤에도 당연하다는 듯 다음 일을 지시하는 것도, 스텔라가 그 모든 지시를 군말 없이 수행하는 것도 이제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잠시 다른 부서에 서류를 전달하러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시선이 맞은편 책상으로 흘러간 데에도 처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서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스텔라의 책상 한쪽에 낯선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군법집도, 행정편람도, 다음 날 회의 자료도 아닌 낡은 문고판 두 권이었다. 표지는 오래 만져 희끗하게 닳았고 모서리는 둥글게 해져 있었다. 책등에는 여러 차례 펼쳤다가 접은 흔적이 가느다란 주름처럼 남아 있었다. 책을 아끼는 사람이 오랫동안 가지고 다닌 물건 특유의 초라하면서도 단단한 모양이었다. 서이현은 펜을 돌리던 손을 멈추었다. 제목은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다.
《냉정과 열정 사이》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해 보였다. 정스텔라가 읽을 법한 책도 아니었다. 서이현이 아는 그녀는 책이라면 법령집이나 업무 관련 자료부터 집어 드는 인간이었고, 무엇보다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 데 인색했다.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한참을 생각한 끝에 ‘딱히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 여자의 책상에 이렇게까지 손때가 밴 연애소설이 놓여 있었다.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시선이 한 번 더 갔다. 다시 서류를 읽다가도 책등의 흐릿한 글자가 눈에 밟혔다. 결국 서이현은 짧게 혀를 차며 책을 집어 들었다. 무게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한 손에 들어 보았다가 앞뒤 표지를 뒤집어 보고, 몇 장을 대강 넘겼다. 종이는 이미 새하얀 색을 잃고 조금 누렇게 변해 있었다. 몇몇 페이지는 다른 곳보다 쉽게 벌어졌다. 자주 펼친 자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희한하게도 활자의 내용보다 정스텔라가 이 페이지를 몇 번이나 읽었을지부터 궁금해졌다. 어느 문장에서 오래 멈췄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는지,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평소 그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는지.
복도 끝에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서이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책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들킨 것도 없으면서 굳이 서류를 한 장 끌어와 읽는 척까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스텔라가 들어왔다.
“다 정리하고 왔습니다.”
“수고했어.”
무심하게 대답한 서이현은 보고서 몇 줄을 더 읽는 척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다시 그녀의 책상으로 갔다. 한 번 눈에 들어온 제목은 이상하리만치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너 책 읽어?”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서이현은 굳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않고 턱만 조금 움직였다.
“저거.”
그제야 스텔라가 책을 보고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저거 말입니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입니다.”
서이현은 순간 대답하지 않았다. 제일 좋아한다. 그 표현이 생각보다 오래 귀에 남았다. 정스텔라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구나 싶어서였다. 그에게 있어 스텔라는 지나칠 정도로 기능적인 인간이었다. 필요한 정보를 가장 빠르게 찾아내고, 그의 지시에서 법률적으로 위험한 부분을 먼저 걸러내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한 모양으로 바꾸어 내놓는 유능한 수족. 필요할 때 부르면 있었고, 시키면 했고, 싫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녀에게도 남들과 똑같이 사소한 취향과 애착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얼마 전에 제 생일이었잖습니까.”
스텔라가 책 표지를 한 번 쓸었다.
“어느 순간부터 매해 생일마다 저 책 두 권을 새로 사는 게 습관이 되어서.”
매해. 같은 책을.
서이현은 팔짱 낀 손가락으로 팔뚝을 한 번 두드렸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는 말이 먼저 나오려다가 이상하게 삼켜졌다.
“제일 좋아하는 책?”
“네.”
“뭔 내용인데.”
관심 없다는 투를 만들려고 일부러 의자 등받이에 깊게 기댔다. 그러나 스텔라가 설명하기 시작하자 그의 시선은 다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붙었다. 오래전에 헤어진 두 사람이 있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과거의 약속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여자 작가가,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남자 작가가 썼다. 같은 시간과 같은 관계를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 보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라고 했다. 서이현은 그중 절반을 거의 흘려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래전에 헤어진 두 사람, 과거의 약속, 그리고 잊지 못한다는 말뿐이었다.
“그런 걸 좋아해?”
스텔라가 눈을 꿈뻑였다.
“십 년씩 지난 사람 하나 못 잊고 사는 게 뭐가 좋다고.”
그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끝난 일은 끝난 것이었다. 지난 일을 다시 되짚으며 현재를 갉아먹는 인간을 서이현은 경멸했다. 잃은 것이 있으면 대신할 것을 찾으면 되었고 실패한 계획이 있으면 더 나은 계획을 세우면 되었다. 누군가가 떠났다면 떠난 자리까지 끌어안고 살아가는 대신 그 사람이 없는 삶에 적응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적어도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스텔라는 뜻밖에도 웃었다.
“그러니까 좋은 건데요.”
“뭐가.”
“잊지 못해서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이요.”
스텔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업무 내용을 보고할 때보다 오히려 조금 느린 목소리였다.
“끝났다고 생각한 관계도 정말 끝난 건지 알 수 없는 거고, 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이 다른 사람한테는 평생 남을 수도 있잖아요. 같은 일을 겪고도 서로 기억하는 게 다를 수도 있고요. 그런 게…… 예쁜 마음인 것 같아요. 저는.”
서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예쁘다. 그 말을 하는 스텔라의 얼굴이 묘하게 낯설었다. 말의 내용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비웃을 마음은 조금 사라져 있었다. 보고서를 읽을 때와 똑같은 단정한 얼굴로 사랑 이야기를 하는 꼴이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보게 되었다.
“……그게 예쁘다고?”
“네.”
스텔라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서이현은 결국 시선을 거두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스텔라는 다시 일을 했고 서이현도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관사로 돌아가 침대에 누운 뒤까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스텔라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귓가에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잊힐 줄 알았다. 이틀이 지나면 더더욱 그럴 줄 알았다.
사흘 뒤 퇴근길, 서이현은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서 방향을 틀었다.
대형서점의 문학 코너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충분히 그럴듯한 핑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스텔라의 사고방식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가장 가까이에 두고 쓰는 부하였고, 스텔라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아는 것은 업무에도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인간이 같은 책을 생일마다 다시 살 정도라면 분명 그 안에 그 사람을 이해할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정작 매대에서 두 권을 찾는 동안 제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계산대로 향하면서 괜히 주변을 한 번 훑어본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관사에 돌아오자 넥타이를 풀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뒤 소파에 앉았다. 책을 펼치는 손길부터 불만스러웠다.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몇 페이지만 읽을 생각이었다.
그 몇 페이지가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새벽이 되었다.
문제는 소설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이현은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활자를 읽을 때마다 그 위로 정스텔라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대목을 좋아했나. 이 문장에서 멈췄을까.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오래 기억하는 것을 정스텔라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가. 한 문장을 읽으면 그 문장을 읽던 그녀를 상상했고, 한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것을 스텔라의 마음과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책을 읽는 것인지 정스텔라라는 인간을 해독하려고 애쓰는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특히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을 마음 한쪽에 남겨둔 채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처음에는 그저 소설 속 설정이었다. 그런데 스텔라가 이 책을 좋아한다고 알고 나자 그 모든 문장이 현실을 향해 문을 열었다.
혹시 정스텔라에게도 그런 놈이 있나.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서이현은 책을 탁 덮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탁자 위 담뱃갑을 집어 한 개비를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첫 연기를 깊게 삼킨 뒤 천장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씨발…….”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다. 스텔라가 예전에 누구와 사귀었든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부하가 되기 전의 시간은 분명 자신의 관할이 아니었다. 누구를 좋아했고, 누구와 헤어졌고, 누구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는 완전히 개인적인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불쾌감이 더 짙어졌다. 자신이 모르는 정스텔라의 과거.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시간. 자신은 이름조차 모르는 누군가가 이미 그녀의 기억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 그것을 알 필요가 없는 것과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서이현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다시 책을 펼쳤다.
결국 그날 새벽, 두 권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며칠 뒤, 외부 일정 때문에 스텔라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하던 그는 한참의 침묵 끝에 전혀 맥락 없는 말을 꺼냈다. 창밖으로 겨울빛이 흐르고 있었고 스텔라는 안전벨트를 맨 채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전에 네가 읽던 책.”
스텔라가 돌아봤다.
“아, 냉정과 열정 사이요?”
서이현은 앞차와의 간격을 확인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 게 좋아?”
스텔라는 몇 초 동안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얼굴이었다가, 곧 눈이 조금 커졌다.
“대위님, 그거 다 읽으셨어요?”
“좀 봤어.”
“에이. 재미없다고 하셨잖아요.”
“재미있다고 한 적 없어.”
“그래도 두 권 다 읽으셨을 것 같은데.”
대답 대신 침묵이 돌아왔다. 그러자 스텔라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다 읽으셨네.”
서이현은 괜히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 자기를 보고 저렇게 웃는 스텔라가 드물다는 사실이 먼저 들어왔고, 그게 싫지 않다는 걸 깨닫자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다. “너는 왜 그게 좋아.” 이번 질문은 조금 달랐다. 책에 대한 감상을 묻는다기보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사람을 묻고 있었다. 스텔라는 창밖을 한 번 보고 생각을 정리했다.
“기다렸다는 것 자체보다는요. 두 사람이 서로를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 좋아요. 같은 시간을 기억하면서도 서로는 다르게 기억하고 있고, 한 사람은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일을 다른 한 사람은 아직 품고 있는 거요. 사람 사이에서는 결국 말하지 않은 마음이 가장 오래 남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마음.
서이현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 모르면 없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모든 것이 지난 뒤에야 사실은 그랬다고 말하는 감정을 왜 낭만이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싫어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대상이 정스텔라의 머릿속이라고 생각하자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참기 어려웠다.
“너도 있어?”
스텔라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네? 뭐가요?”
“그런 사람.”
“…….”
“오래 지나도 못 잊는 사람.”
질문을 던진 뒤에도 그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잡담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스텔라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음…… 글쎄요.”
서이현의 미간이 바로 찌푸려졌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지, 글쎄요는 뭐야.”
말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튀어나갔다. 스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화를 내세요?”
“내가 언제 화를 내.”
“지금요.”
스텔라는 작게 웃더니 다시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한참 뒤 마치 방금의 질문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는 듯 말했다.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세 글자가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남았다. ‘없다’를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생길 거라는 뜻처럼 들렸다. 앞으로 정스텔라가 살아갈 긴 시간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 아직 이름도 얼굴도 없는 남자가 언젠가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자신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 그때 스텔라가 되물었다.
“대위님은요?”
“뭐.”
“그렇게 오래 기억할 사람 있으세요?”
서이현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이혼한 아내를 생각해야 옳을 것 같았다. 몇 년을 한집에서 살았고 아이까지 낳은 여자였다. 그런데 기억 속의 얼굴은 희미했다. 대신 바로 옆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스텔라의 옆얼굴이 터무니없이 선명했다. 눈가로 흐르는 머리카락, 미세하게 움직이는 속눈썹, 창에 비친 희고 고요한 얼굴까지 쓸데없이 자세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주 불쾌한 가정이 머릿속으로 기어들었다.
언젠가 정스텔라가 자신의 옆에 없다면.
아침마다 보고서를 들고 들어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없고, 사무실 맞은편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도 사라지고, 이렇게 차 옆자리에 앉혀놓은 채 아무 말이나 던질 수도 없다면. 언젠가 인사이동으로 갈라지고, 각자 다른 자리에 올라가고, 나중에는 타인의 입을 통해 건너 건너 안부를 듣게 된다면.
그때도 자신은 이 여자를 지금처럼 선명하게 기억할까.
서이현은 생각을 거기서 잘랐다. 아직 사라지지도 않은 사람의 부재를 상상하는 짓 자체가 비위에 맞지 않았다.
“없어.”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스텔라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 담담한 반응까지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스텔라는 다시 그 책을 읽었다고 했다. 서이현이 책 이야기를 한 탓에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펼쳐봤다고, 퇴근도 못 한 채 야근하던 어느 밤에 너무나 평범한 말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도 연차 많이 쌓이면 피렌체 같은 곳 가볼 수 있겠죠?”
서류를 넘기던 서이현의 손끝이 멎었다.
“연차 쌓이면 피렌체?”
“네.”
“그렇게 한가해? 군인이, 그것도 소위가 언제 연차를 모아서 유럽까지 간다고.”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스텔라는 익숙하다는 듯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했다.
“거기 가서 뭐 하려고. 기다리는 놈이라도 있나 보지?”
“모아둬야죠. 몇 년 후를 위해서.”
스텔라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직 없지만…… 그래도, 당신이 없었던 과거부터 내가 오늘날을 위해, 미래를 위해 이렇게 모아뒀다, 라고 하면.”
그녀는 타이핑을 멈추지도 않은 채 잠깐 생각했다.
“어쩌면 그 남자한테 잊을 수 없는 순간 하나를 선물해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타닥, 타닥. 규칙적이던 키보드 소리가 그 순간 서이현에게만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 선물.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정스텔라는 그 인간에게 건넬 순간을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과 함께 보내는 시간, 자신이 억지로 붙잡아 야근시키는 밤들, 그녀가 모으고 있다는 휴가와 젊음과 기억의 일부가 언젠가 나타날 누군가를 위한 과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자신은 그녀의 하루 대부분을 움켜쥐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조차 스텔라에게는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건넬 이야기의 재료가 될 뿐일지도 몰랐다.
“잊을 수 없는 순간?”
목소리가 낮아졌다.
“쓸데없는 망상 하네.”
서이현은 몸을 앞으로 숙여 스텔라가 타이핑하던 키보드 위로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등과 키 사이에 그의 손바닥이 겹치면서 소리가 뚝 끊겼다.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그딴 휴가 쓸 일 없을 텐데.”
“…….”
“내가 안 보낼 거거든.”
유치한 말이라는 건 본인도 알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런데 스텔라는 그 말마저 마치 다음 주 일정 변경을 통보받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네.” 그 한 글자가 오히려 속을 뒤집었다. 완벽한 복종처럼 보이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서이현은 이제 너무 오래 그녀를 보아와서 알고 있었다. 정스텔라는 굴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필요한 순간에 순종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쓸 뿐이었다. 자신이 시간과 행동을 통제한다고 해서 그녀의 내면까지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책 속의 사람들처럼, 자신도 그녀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이현은 스텔라의 손등 위에서 손을 천천히 뗐다.
“네 시간이 누구 건지 확실히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깟 소설에 나오는 환상 같은 거, 네 현실에는 없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서이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오늘 야근이다. 저녁이나 시켜.”
스텔라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었다.
“뭐 드시겠습니까?”
서이현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빨았다. 가슴속에 눌러둔 기분 나쁜 감정이 연기와 함께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글쎄.”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그는 비스듬히 웃었다.
“네가 좋아하는 피렌체에서는 뭐 먹냐?”
스텔라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린 짬뽕이나 먹어야겠네. 중국집 전화번호 알지?”
“네. 맵게 합니까?”
그 담담함이 또 신경을 긁었다. 서이현은 스텔라가 매운 것을 잘 못 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 맵게.”
잠깐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너도 똑같은 거 시켜.”
스텔라는 한 번도 싫다고 하지 않았다. 전화를 들어 주문했다.
“충칭반점이죠? 네. 짬뽕 두 그릇. 아주 맵게 해주세요. 부대로 가져다주시면 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키보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재개되었다. 서이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 여자를 계속해서 긁고 있었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줄 알면서 같은 것을 시키고, 휴가를 안 보내겠다고 하고, 있지도 않은 미래의 남자를 비웃었다. 그런데 정작 스텔라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책에서 읽었던 말들이 불쾌하게 겹쳐졌다. 같은 시간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두 사람.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
어쩌면 자신도 정스텔라를 모르는 것 아닐까.
매일 하루의 대부분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 책 속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아나 본데.”
결국 서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십 년 뒤에 피렌체에서 만나자고 약속이라도 했지. 넌 뭐냐.”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스텔라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있지도 않은 사람 기다리면서 혼자 낭만 타령이나 하고.”
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서이현은 그 평온한 얼굴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가기를 바랐다. 자신만 이렇게 뒤틀리고 있다는 게 억울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스텔라는 오히려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기분 좋잖아요.”
“뭐가.”
“미래에 만날, 누군지도 모를 남자를 지금부터 사랑하는 행위가.”
서이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텔라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덧붙였다.
“아직 만나지도 못한 그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그 순간 서이현은 자신 안에서 무엇인가 아주 불쾌한 형태로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질투하는 자신이 우스웠고, 그것이 질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더 우스웠다. 그래서 그는 그 감정을 분노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스텔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화가 난 것뿐이라고, 부하의 되지도 않는 망상에 짜증이 났을 뿐이라고. 그런데 스텔라는 거기에 한술 더 떴다.
“그래도 대위님은 그런 여자 생겼으면 좋겠어요.”
서이현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이건 진심이에요.”
그는 웃었다. 아주 짧고 허탈한 웃음이었다.
자신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정스텔라의 미래를 빼앗긴 기분인데, 정작 이 여자는 자신의 미래에 다른 여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말이 축복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잔인하게 들렸다.
“정스텔라.”
“네.”
“그런 말 하지 마.”
말을 뱉고 나서 오히려 서이현 자신이 잠시 조용해졌다. 생각보다 너무 솔직하게 튀어나온 문장이었다. 스텔라도 조금 놀란 듯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 뒤, 아주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위님은 제가 사라져도, 십 년 후에도 저를 잊지 않으시겠죠.”
그 질문 앞에서는 비웃음도 화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십 년.
막연했던 시간이 갑자기 실물처럼 눈앞에 놓였다. 십 년 뒤 자신은 마흔아홉이었다. 지금 목표대로라면 더 높은 계급장을 달고 있을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아래에 두고 있을 것이다. 스텔라도 더 이상 소위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자신의 수족이라 부를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갈지도 몰랐다. 같은 부대에 있을 확률보다 서로 다른 곳에 있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 정스텔라는 여전히 자기 옆에 있었다.
서이현은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누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 손바닥의 무게만 얹었다.
“그래.”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낯설었다.
“십 년이 지나도.”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못 잊겠지.”
스텔라가 웃었다.
“애초에 저를 안 놔주실 것 같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기가 그토록 감추고 부정하던 무언가를 스텔라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해서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스텔라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 저희도 십 년 후에 피렌체에 가요.”
서이현의 손가락이 멎었다.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스텔라는 이미 다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십 년 열심히 일했다는 보상으로.”
피렌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이름을 들으면 짜증부터 났다. 정스텔라가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와 가게 될지도 모르는 장소였고,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낭만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스텔라는 지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미래 안에 서이현을 밀어 넣었다.
십 년 후의 피렌체에.
그녀와 자신을 함께.
서이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이상한 것이 올라왔다. 기쁨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낯설었고 안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뜨거웠다. 그는 그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싫어 의자에 몸을 던지듯 기대었다.
“누구 맘대로 십 년 후야.”
“대위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내가 그때까지 널 살려둘 것 같아?”
스텔라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면 못 가겠네요.”
“아니.”
대답이 너무 빨랐다. 스텔라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서이현은 괜히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갈 거면 제대로 가야지.”
“…….”
“가서 네 짐이나 들게 할 거면 지금부터 체력 단련이나 해.”
스텔라가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서이현은 그 시선을 받고서야 조금 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십 년 뒤의 여행을 이미 갈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누구 맘대로 십 년 후냐고 비웃은 사람이.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거기 가서도 네가 내 수족 노릇 해야 할 테니까.”
스텔라는 몇 초 동안 그를 바라보다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네.”
늘 듣던 한 글자였다.
그런데 이번의 ‘네’는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차갑게 들리지 않았다.
타닥, 타닥. 다시 키보드 소리가 이어졌다. 모니터 빛이 스텔라의 옆얼굴을 희게 비추고, 형광등은 여전히 몇 분에 한 번씩 희미하게 떨렸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집무실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짬뽕 냄새도 없었고, 창밖에는 피렌체의 오래된 건물 대신 어두운 부대 건물만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서이현에게는 아주 사소한 무언가가 이미 이전과는 돌이킬 수 없게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십 년 뒤.
서이현은 미래를 생각하는 데 익숙한 인간이었다. 언제 진급할지, 누구를 자기 편으로 만들지, 어떤 자리를 거쳐 어디까지 올라갈지. 그의 미래는 늘 계획표와 비슷했다.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까지 가는 경로가 있었으며, 방해가 되는 것은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래를 좋아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얼마든지 자기 뜻대로 설계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그 계획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 들어와 버렸다.
정스텔라.
십 년 뒤 어떤 계급장을 달았는지도 모르는 채, 군복이 아니라 사복을 입고, 피렌체의 낯선 거리를 자기 옆에서 걷고 있는 여자. 어떤 표정으로 걷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데 이상하게 ‘옆에 있다’는 사실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게 서이현을 잠시 말없게 만들었다. 문득 며칠 전 스텔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 남을 수도 있다는 것.
처음 들었을 때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간 일을 왜 붙잡느냐고 생각했다. 잊을 수 있으면 잊으면 되는 것이고, 잊지 못한다면 억지로라도 잊는 것이 낫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쩌면 오늘 밤이 자신에게는 그런 순간이 될지도 몰랐다.
정스텔라에게는 별것 아닌 야근의 한 장면. 상사가 괜히 책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고, 피렌체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고, 매운 짬뽕을 억지로 시키고는 십 년 뒤 여행을 가겠다고 말한 밤. 십 년이 지나면 그녀는 어쩌면 정말 기억조차 하지 못할지도 몰랐다.서이현은 왠지 자신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십 년 뒤 스텔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살아가고 있어도 자신은 기억할 것 같았다. 지금의 형광등 색까지,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속도까지, ‘그러면 저희도 십 년 후에 피렌체에 가요’라고 말하던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그때 정스텔라가 잊었다고 하면 아마 지금과 똑같이 빈정거릴 것이다. 군기가 빠졌어? 대위가 먼저 한 말을 잊어? 죽고 싶어? 그런 식으로. 그리고 그녀는 십 년 뒤에도 지금처럼 무표정하게 ‘네’라고 대답할지도 몰랐다. 그 장면을 생각하자 이상하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정 소위.”
스텔라가 타이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네?”
서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똑똑히 기억해 둬라. 십 년 뒤에도.
네가 잊어도 내가 기억할 테니까.
그런데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지나치게 우스웠다. 그래서 그는 혀끝까지 올라온 문장을 삼키고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만들었다.
“짬뽕 오면 불러.”
스텔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날 밤 관사로 돌아온 서이현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기 전에 서재 앞에 섰다. 딱딱한 군사전략서와 정치 서적, 오래된 역사책들 사이에 이질적인 두 권이 꽂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직접 산 연애소설이었다. 그는 책 한 권을 꺼냈다. 처음에는 정스텔라가 왜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 샀다. 그러다 어느새 문장 하나만 읽어도 다음 문장이 무엇인지 기억할 만큼 여러 번 펼쳤다. 책 속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문장을 좋아한 정스텔라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읽었고,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읽었으며, 다시 읽을수록 오히려 스텔라를 더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서이현은 한참 동안 낡지도 않은 자기 책의 표지를 내려다봤다.
그깟 사랑 소설.
잊어버리면 되는 이야기.
오래전의 사람 하나를 잊지 못해서 십 년을 끌고 가는 인간들의 이야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벌써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사람은 지나간 뒤에야 무엇이 중요했는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순간부터 이미 그것이 오래 남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것을.
서이현은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손끝이 책등에서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십 년 뒤 피렌체.
말도 안 되는 약속이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이름도 붙어 있지 않았고, 그때까지 같은 곳에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서이현은 약속 같은 것에 인생을 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날을.
그리고 처음으로, 그날만큼은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