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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엠바고

생크림단팥빵 2026. 7. 26. 23:26

시부야역 하치코 출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도쿄의 여름이 두 사람을 통째로 삼켰다. 개찰구 안쪽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던 냉방의 찬 기운은 자동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허망하게 끊겼고, 대신 뜨겁고 축축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6월의 오후였다. 장마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 햇볕은 한여름처럼 사나웠고, 검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희끗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전광판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광고 문구와 익숙한 글로벌 브랜드의 이름이 정신없이 교차했고, 횡단보도 앞에 모인 사람들은 신호가 바뀌기도 전부터 물결처럼 움직였다. 누군가의 향수 냄새, 길가 음식점에서 풍겨오는 기름 냄새, 지하철 입구에서 밀려나오는 서늘한 바람과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한꺼번에 뒤섞였다. 낯선 도시가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은 대개 무례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들이밀어서 어디부터 보아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식이었다.

 

서이현은 별 감흥이 없다는 얼굴로 그 모든 것을 훑었다. 정확히는, 감흥을 느끼기도 전에 몸에 밴 습관부터 움직였다. 출구 번호, 역으로 다시 들어가는 입구, 가장 가까운 택시 승강장, 인파가 상대적으로 덜 몰린 길, 맞은편 건물의 비상계단. 시선이 몇 번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에는 벌써 주변 지형이 대강 정리되어 있었다. 해외가 처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이 평생 한두 번 밟아볼 나라를 그는 일 때문에 여러 번 오갔다. 파견, 출장, 회의, 현지 군 관계자와의 만찬. 도착하자마자 일정표부터 확인하고 호텔 방에 처박혀 노트북을 켜는 종류의 이동이었다. 그런 것을 여행이라 불러도 되는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캐리어를 맡겨두고 나왔으니 어깨에 걸린 것은 작은 크로스백 하나가 전부였다. 노트북도 없었다. 서류철도 없었다. 오늘 안에 결재해야 할 문서도, 몇 시까지 누구에게 보고를 올려야 한다는 일정도 없었다.

 

그 사실이 도리어 이상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깐 서 있던 그의 반소매 셔츠 끝을 작은 손이 잡아당겼다.

 

서이현이 고개를 내렸다.

스텔라였다.

 

얇은 민소매 원피스 차림의 스텔라는 이미 이 도시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부터 조금 들떠 있기는 했지만, 역 밖으로 나온 뒤에는 그것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눈동자가 분주했다. 전광판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맞은편 골목의 간판들을 보고, 다시 이현을 올려다봤다. 평소 부대에서 보고서 한 장을 넘길 때조차 빈틈을 찾아내던 눈이 지금은 쓸데없는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의 눈처럼 반짝였다.

 

“오빠. 일단 저기부터 가자.”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골목 하나가 있었다.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여 들락거리는 번잡한 상점가였다. 액세서리 가게와 옷가게, 음식점 간판들이 위아래로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어디에선가 달콤하게 구운 반죽 냄새가 풍겨왔다.

서이현은 다시 스텔라를 내려다봤다.

 

“어디.”

“저기.”

“그러니까 저기에 뭐가 있는데.”

“가보면 알아.”

 

그 대답이 너무 당연해서 헛웃음이 났다.

 

“벌써 눈이 돌아갔네.”

 

평소라면 그 말 한마디로 상대의 흥을 적당히 눌렀을 것이다. 그런데 스텔라는 듣든 말든 그의 손을 잡았다. 손목도 아니고 손바닥이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그리고 그대로 사람들 사이로 뽈뽈 걸어 들어갔다.

 

서이현은 반 박자 늦게 끌려갔다.

그 사실이 조금 어처구니없었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반대였다. 어디를 가든 자신이 먼저 걷고 스텔라가 따라왔다. 부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위와 소위였고, 한때는 상관과 부관이라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 만큼 기울어진 관계였다. 그의 한마디에 스텔라는 멈췄고, 움직였고, 입을 다물었다. 그 질서가 너무 오래 지속된 탓에 연인이 된 뒤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뒤집혔다.

 

스텔라는 일본어를 했다. 그것도 꽤 능숙하게. 이현이 모르는 가게를 알고 있었고, 가보고 싶은 장소를 수십 개 저장해 놓았으며, 어느 노선에서 갈아타야 하는지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훨씬 많았다.

 

“야, 느려.”

 

뒤에서 한마디 하자 스텔라가 돌아봤다.

 

“오빠가 다리가 더 긴데 왜 느려?”

“네가 사람 사이를 무슨 침투조처럼 다니잖아.”

“나 작은 게 이럴 때 좋지.”

 

그 말을 하고 또 앞으로 돌아서는 뒤통수를 이현이 한동안 바라봤다. 정말로 작았다. 제 몸에 비하면 더 그랬다. 그 작은 체구가 사람들 사이를 기민하게 빠져나갈 때마다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실렸다. 놓칠까 봐 그러는 것인지, 자기를 끌고 가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싫지 않았다.

 

“내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돈을 모아왔는데.”

 

스텔라가 불쑥 말했다.

서이현이 눈썹을 들었다.

 

“돈을 모아?”

“응.”

“그래서 지금 네가 쏘는 거야?”

“내가 오늘 우리 오빠 본고장 장어덮밥 먹인다.”

 

말끝이 유난히 의기양양했다.

 

이현은 잡혀 있던 손을 한번 비틀었다. 그 순간 주도권을 되찾듯 손가락을 깊이 끼워 잡았다. 스텔라가 힐끗 돌아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쏘는 거면 비싼 거 시켜도 돼?”

“곱빼기도 시켜줄게.”

“그래. 그럼 가자.”

 

좋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스텔라가 데려간 곳은 큰길에서 한참 들어간 좁은 골목 안이었다. 화려한 관광객용 간판 대신 오래된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고, 문을 여는 순간 장어 굽는 냄새가 기름진 열기와 함께 얼굴로 밀려왔다. 실내는 생각보다 작았다. 카운터 자리 몇 개와 2인용 테이블 서너 개, 주방과 손님 사이를 가르는 낮은 칸막이가 전부였다. 천장의 노렌이 에어컨 바람에 느릿하게 흔들렸고, 철판에서는 기름이 튀는 소리가 끊임없이 났다.

스텔라는 익숙한 사람처럼 일본어로 두 명이라고 말한 뒤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서이현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유창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막상 자기 귀로 들으니 조금 이상했다. 평소에는 군사용어와 법령 번호, 보고 문체를 막힘없이 읊는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언어로 점원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발음까지 매끄러웠다.

 

스텔라가 메뉴판에서 눈을 들더니 자신을 한번 봤다.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어차피 여행인데 낮술 정도는 괜찮지?”

 

대답도 듣기 전에 주문했다.

생맥주 두 잔. 장어덮밥 하나. 곱빼기 하나.

서이현이 카운터 의자에 앉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낮술?”

“휴가잖아.”

“대낮부터 맥주를 시키네, 우리 소위가. 군기가 빠졌어.”

 

말과 달리 얼굴에는 희미하게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점원이 물수건을 건넸다. 서이현이 그것으로 천천히 손을 닦는 동안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수저를 정리하고 물을 따라 그의 앞에 놓았다. 너무 익숙한 동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이 먼저 기억해낸 것처럼. 이현의 시선이 그 손끝에 잠깐 머물렀다. 그녀는 아직도 이런 식이었다.

 

부관일 때 몸에 밴 습관 중 일부는 연인이 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요할 때면 당연하다는 듯 스텔라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고, 그녀가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둘 사이에서 어디까지가 과거의 잔재이고 어디부터가 현재의 친밀함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스텔라가 물잔을 밀어주며 말했다.

서이현이 잔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뭘 노력해.”

“뭘이래.”

“고백도 내가 하게 만들어놓고.”

“내가 얼마나 티를 냈는데.”

“그걸 티라고 냈냐.”

 

정확히 말하면 스텔라가 티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방식이 너무 스텔라다웠다는 데 있었다. 그를 걱정하고, 챙기고, 제 편을 들고, 남들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도망쳤을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 서이현은 그것을 충성심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잘 길들여놓은 수족의 반응이라고 생각했으며, 꽤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결국 못을 박은 건 자신이었다.

 

너 나 좋아하지.

그 질문을 거의 심문하듯 내던졌던 날이 떠올랐다.

 

서이현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상상 못 한 거 치고는 잘도 꼬셨네, 나를.”

 

스텔라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뭘 봐."

“그냥.”

“뭐.”

“이렇게 오빠랑 노니까 너무 좋아.”

 

그리고 작게 웃었다.

 

“작년엔 상상도 못 했는데.”

 

그 말은 이상할 만큼 가볍게 나왔다.

그러나 서이현에게 작년은 가볍지 않았다.

 

잠깐 오래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무실. 밤늦게까지 켜져 있던 형광등. 자신의 책상 옆에 꼿꼿하게 서 있던 스텔라. 보고서를 고쳐 쓰던 손.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에게 굳이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 그녀의 손바닥을 재떨이처럼 쓰고, 씹던 껌을 건네고, 사적인 일까지 맡기면서도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그때의 두 사람이 지금 일본의 작은 장어집에 나란히 앉아 낮술을 마신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작년에 상상도 못 했대.”

 

서이현이 낮게 웃었다.

 

“그때는 뭐, 대위님 무릎에 앉아서 장어 먹여주는 거 상상했어?”

“미쳤나 봐.”

“왜. 지금은 가능하잖아.”

“밥이나 먹어.”

 

마침 장어덮밥이 나왔다.

스텔라는 그릇을 받자마자 잠시 손을 모았다.

눈을 감았다.

서이현은 장어를 집으려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

식전 기도.

 

사귄 지 몇 달이 되었는데도 매번 빼먹지 않았다. 눈을 감은 얼굴은 평소보다 어린 것 같기도 했고, 이상하리만치 단정해 보이기도 했다. 민소매 아래로 드러난 목선과 쇄골 위로 가게 조명이 얇게 내려앉았다. 그가 장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스텔라가 눈을 떴다.

 

“다 했어?”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타이밍이 그랬을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스텔라가 첫 숟갈을 크게 떠먹었다. 양볼이 빵빵해졌다. 그리고 조용히 눈이 커졌다. 서이현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알았다. “맛있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스텔라가 입안의 것을 다 삼키기도 전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군대에서의 정스텔라와 지금 눈앞의 정스텔라가 아무래도 같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부대에서는 아무리 당황해도 얼굴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던 여자가 음식 하나 맛있다고 저렇게 무장해제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현도 장어를 한 점 더 먹었다. 맛있었다. 양념은 진했지만 지나치게 달지 않았고, 기름진 장어 뒤로 미묘하게 매운맛이 올라왔다. 한국에서 먹던 것과 조금 달랐다.

 

“여기 어떻게 찾았어.”

“우리 고등학교 때 일본인 선생님이 도쿄 출신이었거든. 오랜만에 연락해서 물어봤어.”

“선생님한테까지?”

“응. 남자친구랑 여행 간다고 했더니 이것저것 추천해주셨어.”

 

서이현이 씹던 것을 멈췄다.

 

“남자친구랑 간다고 했어?”

“당연하지.”

 

남자친구.

 

자기 입으로 할 때보다 스텔라 입에서 들을 때 그 단어는 더 이상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구체적이라서 그랬다. 상관도 아니고 대위도 아니고, 서이현이라는 사람이 스텔라의 남자친구라는 사실. 직위와 이해관계와 명령이 빠진 자리에 남는 이름 하나. 서이현은 생맥주를 들이켰다.

 

“데이트 명소도 추천받았어?”

“응. 나만 믿어.”

 

그는 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말이 제일 불안해.”

 

 


 

결과적으로 스텔라의 데이트 코스는 꽤 괜찮았다. 아니,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리기에는 제법 좋았다. 서이현이 여행이라는 것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남들과 조금 달라서 그렇지, 적어도 지금까지 스텔라가 데려간 곳 중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여길 왜 왔지’ 하고 생각하게 만든 곳은 하나도 없었다. 장어덮밥은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고,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 들어간 골목에는 관광 안내책자에서나 보던 반듯한 풍경보다 더 볼 것이 많았다. 오래된 레코드숍 앞에는 이름 모를 가수의 빛바랜 포스터가 몇 겹이나 덧붙어 있었고, 한 평도 안 될 것 같은 가게 안에서는 나이 든 주인이 부채질을 하며 센베이를 굽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복잡하게 얽힌 전선이 지나갔고, 빨래가 널린 작은 주택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유유히 담장을 건넜다. 서이현이라면 혼자 여행을 왔을 경우 평생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것들인데, 스텔라는 그런 것마다 걸음을 늦추었다. 예쁘다며 사진을 찍고, 무슨 가게인지 궁금하다며 안을 들여다보고,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면 금세 고개를 돌렸다. 목적지까지 가장 짧은 길을 찾는 데 익숙한 서이현에게 스텔라와 걷는 길은 이상할 정도로 자주 옆으로 샜다. 처음에는 그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두 번 따라 방향을 틀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는 스텔라가 또 무엇을 발견했나 싶어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부터 보게 되었다.

 

시부야의 오후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해가 건물 사이로 조금씩 기울고 있는데도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고, 신호등 앞에서는 몇 걸음마다 다른 사람의 어깨와 팔이 스쳤다. 스텔라는 그 속을 놀라울 만큼 잘도 헤집고 다녔다. 큰길 건너편에 캐릭터 숍이 보이면 손을 잡아끌었고, 지나가던 길목에 가챠 기계가 줄지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조금 전까지 어디를 가려 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서이현은 처음 두 번까지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구경했다. 세 번째 캡슐을 뽑고도 스텔라가 원하던 것이 나오지 않았을 때는 코웃음을 쳤고, 네 번째 동전을 꺼내는 것을 보고는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라고 핀잔까지 줬다. 그런데 막상 스텔라가 정말 포기하려고 몸을 일으키자 자기가 먼저 빈자리에 들어갔다.

 

“비켜봐.”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몇 번을 했는데 안 나오는지 궁금하잖아.”

“그게 무슨 논리야. 이거 그냥 운인데.”

“알아.”

 

그렇게 말하며 동전을 넣는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스텔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첫 번째는 같은 캐릭터가 또 나왔다. 서이현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팼다. 두 번째에는 아예 스텔라가 관심도 없던 것이 나왔고, 세 번째쯤 되자 이제 됐다고 말리는 스텔라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지갑에서 동전을 더 꺼냈다. 서이현은 무엇이든 자신의 통제 안으로 들어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가챠라고 해서 예외일 이유는 없었다. 몇 천 원짜리 플라스틱 장난감 하나를 상대로 그런 성질을 발휘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본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다섯 번째 캡슐 안에서 스텔라가 원하던 조그만 캐릭터가 굴러나왔을 때, 정작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 것은 스텔라인데도 더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사람은 서이현이었다. 그는 별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캡슐을 뜯어 내용물을 꺼낸 뒤 스텔라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웃어.”

“그냥.”

“그냥이 어딨어.”

 

스텔라는 손바닥 위의 작은 장난감과 서이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웃음을 삼키려는 듯 입술을 꾹 물었다. “오빠 은근 귀여워서.” 서이현의 눈썹이 곧장 올라갔다. “죽을래?” 평소라면 그 말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스텔라가 받아든 장난감을 가방 안에 아무렇게나 넣으려 하자 자기가 먼저 손을 뻗었다. 잃어버릴 것 같으니 제대로 넣으라며 작은 지퍼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직접 넣어주었다. 가방을 도로 건네는 손길까지 보고 있던 스텔라가 또 웃자 이번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귀찮다는 듯 혀를 한번 찼을 뿐이었다.

 

그 뒤에도 두 사람은 많이 걸었다. 사실 서이현의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많이 걸었다. 소품 가게와 편집숍을 몇 군데나 드나들었고, 스텔라는 드럭스토어에서 한참 동안 화장품과 과자와 이상한 생활용품을 비교했다. 처음 한두 곳에서는 서이현도 문 앞에 기대어 휴대전화를 보며 기다렸지만, 세 번째쯤부터는 어느새 스텔라 옆에서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물건 하나를 집어 들고 뒷면의 일본어를 읽어보다가 자기에게 뭔가 설명하면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필요도 없어 보이는 것을 넣으면 그걸 정말 사야 하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경우 스텔라는 “여행 왔잖아.”라는 한마디로 모든 합리성을 무력화했고, 이상하게도 그 문장 앞에서 서이현은 더 따지지 못했다. 오늘만 몇 번째 듣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들을 때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왔으니까.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것을 해도 되고, 당장 쓸모가 없는 것을 사도 되고, 목적 없이 골목을 돌아다녀도 되는 시간. 자신에게는 그런 시간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다리였다. 군인으로 십수 년을 살았고 체력 때문에 남에게 뒤처져본 적도 거의 없었지만, 서이현은 목적 없는 도보 이동을 싫어했다. 훈련이라면 참았다. 작전이라면 더 참을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해 걷는지 명확했으니까. 그러나 스텔라와 보내는 오후에는 목적지가 계속 바뀌었다. 저 가게까지만, 저 골목까지만, 저기 하나만 보고. 그 ‘하나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세 번째 편집숍을 나왔을 무렵에는 허벅지가 묵직해지고 발바닥에서 은근한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결국 서이현은 자기보다 반 걸음 앞에서 여전히 신나게 걷는 스텔라의 뒤통수를 보며 말했다.

 

“너 체력이 왜 이렇게 좋아.” 스텔라가 돌아보았다. 햇볕과 더위 탓에 볼은 살짝 붉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조금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은 밝았다. “오빠 힘들어?” 그 질문 자체가 자존심을 건드렸다.

 

“안 힘들어.”

“근데 왜 뒤처져.”

“내가 언제.”

“지금.”

 

스텔라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가방을 뒤적였다. 작은 손풍기가 나왔다. 버튼을 누르자 미지근한 여름 공기 속에서 그나마 시원한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서이현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피하려다 말았다. 솔직히 시원했다. 땀에 젖은 관자놀이와 목덜미에 바람이 닿자 살 것 같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 기분 나빴다.

 

“오빠 장어덮밥 먹일 게 아니라 드럭스토어에서 약부터 먹일 걸 그랬나.”

 

그 순간 서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약?”

“응. 다리 아프다며.”

“내가 약 먹어야 될 정도로 늙어 보여?”

“그 말이 아니잖아.”

“너 지금 나 몇 살로 보는 거야.”

“서른아홉.”

“정확히 알고 있는데 왜 그래.”

 

스텔라는 대답 대신 손풍기를 조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서이현은 툴툴거리면서도 끝내 그 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한참 보던 스텔라가 장난기가 생겼는지 자신의 원피스 자락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나랑 옷 바꿔 입을래?” 하고 물었다. 그 말에는 일말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서이현은 즉시 “닥쳐.” 하고 잘라 말했다. 스텔라가 크게 웃었다. 지나가던 남자 둘이 소리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이쪽을 돌아봤고, 서이현의 시선도 거의 동시에 그들을 향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몇 초간 쳐다보자 상대들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그제야 이현은 다시 스텔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웃지 마.”

“왜?”

“아무한테나 그렇게 웃어주지 말라고.”

 

말을 뱉고 난 뒤 자신도 잠깐 어이가 없었다. 저 웃음이 자기 소유도 아닌데. 그런데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텔라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이번에는 일부러 입술을 다문 채 눈으로만 웃었다. 그것마저 귀여워 보여서 서이현은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결국 들어간 카페는 애초 계획에 없던 곳이었다. 스텔라가 가려고 했던 유명한 카페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서이현은 그것을 보자마자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스텔라도 그의 다리를 조금은 의식한 모양인지 이번에는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골목 한쪽에서 작은 나무 간판을 발견해 안을 들여다보더니 여기라도 들어가자고 했다. 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커피 향이 섞인 서늘한 공기가 밀려왔다. 에어컨 대신 천장 선풍기와 스탠드형 선풍기가 느릿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벽에는 빛이 바랜 영화 포스터와 LP판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꾸며놓은 레트로가 아니라 정말 오래되어 그렇게 된 공간 같았다.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자 서이현은 거의 몸을 던지듯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스텔라는 웃지 않았다. 대신 앙버터토스트와 푸딩, 아이스커피를 주문하고는 토스트가 나오자 큰 쪽을 자연스럽게 그의 접시 앞으로 밀었다.

 

서이현은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었다. 버터는 묵직했고 빵은 겉만 얇게 바삭했다. 단팥의 단맛이 생각보다 과하지 않았다. 씹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이건 인정.” 이어서 푸딩도 한 숟갈 떴다. 단단하면서도 매끈하게 갈라지는 질감과 진한 카라멜 맛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숟가락을 든 채 스텔라를 쳐다봤다. “너 그 선생님한테 절해라.” 스텔라는 그 말을 듣고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서이현에게 맛있다는 말보다 훨씬 확실한 칭찬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렇게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날 처음이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먹기 위해 줄을 서지도 않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지도 않는 시간. 서이현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휴식이라기보다 비어 있는 칸에 가까웠다. 비어 있으면 채워야 했다. 휴대전화를 열어 메일을 확인하거나, 인사 관련 연락을 살피거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의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그래서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을 때 손이 움직인 것도 거의 반사였다. 그보다 먼저 스텔라가 말했다. “노트북도 안 가져왔으니까 일하지 마.” 서이현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멈췄다. “너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평소라면 정말로 날이 섰을 문장이었다. 그러나 스텔라가 보는 그의 얼굴에는 화가 없었다. 스텔라도 그것을 아는지 전혀 겁먹지 않고 턱을 괸 채 말했다. “응. 이번 여행 동안은.” 잠깐 뜸을 들인 뒤,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나한테 집중해.”

 

그 말이 예상보다 깊게 들어왔다. 서이현은 한동안 아무 반응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화면은 아래로 향하게 뒤집어버렸다. 그러고도 순순히 졌다는 얼굴을 하기 싫었는지 “이거 뺏으면 어쩔 건데. 바다에 던질 거야?” 하고 물었다. 스텔라는 망설임도 없이 “필요하면.”이라고 답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많이 컸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다시 집지는 않았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기울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빛은 테이블 모서리와 커피잔의 물방울을 지나 스텔라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음, 딱 좋은 공기다.” 하고 중얼거렸다. 서이현은 처음에는 그 말에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텔라는 대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지금 느낀 것을 입 밖으로 꺼낸 것뿐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고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속눈썹 끝에 걸린 빛과, 창가에 가까운 쪽 볼이 조금 더 환하게 보이는 것과, 아무런 경계도 없이 멀리 시선을 둔 얼굴. 사무실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보고서를 읽을 때의 집중과도 달랐고, 자신의 기분을 살필 때의 긴장과도 달랐다. 그냥 쉬고 있는 얼굴이었다.

 

휴대전화가 다시 한번 진동했다.

이번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스텔라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서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봤다.

그러다 스텔라가 문득 물었다.

 

“오빠는 여행 어디 가봤어?” 질문의 방향이 갑작스러워 서이현은 잠깐 눈을 들었다. “갑자기?”

 

“그냥. 생각해보니까 오빠 일하느라 진짜 여행은 안 다녔을 것 같아서. 쉬는 날 생겨도 그 시간에 집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잘 것 같고.”

“야,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발끈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거슬렸다. 그는 괜히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자신이 해외에 안 가본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동남아도, 유럽도, 중동도 다 가봤다고. 스텔라는 잠자코 듣다가 아주 간단하게 되물었다.

 

“여행으로?”

 

그 한마디에 서이현의 말이 끊겼다. 출장지의 호텔 창문 밖으로 본 도시들은 많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곧바로 현지 군부대로 이동했던 나라, 회의가 끝난 뒤 거래처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 첫 비행기로 떠난 도시, 호텔 방에서 밤새 서류를 고치느라 관광지는커녕 근처 편의점 하나 못 가본 곳. 가본 나라의 수는 많았지만 거기서 무엇을 보았냐고 물으면 이상할 만큼 기억나는 것이 적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인정했다.

 

“……관광으로 간 적은 없지.”

“봐.”

“출장도 외국 가는 거야.”

“가서 뭐 했는데?”

“호텔에서 서류 보거나 현지 군부대 들락거렸지.”

 

스텔라가 자신도 모르게 안쓰러운 얼굴을 하자 서이현은 곧장 인상을 썼다. “그 표정 뭐야. 불쌍해?” 스텔라가 잠시 고민하다 “조금?”이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또 한 번 죽고 싶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 모두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뒤 스텔라가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서이현은 푸딩을 먹다가 그녀를 봤다. “뭔데.” 스텔라는 바로 묻지 않았다. 괜히 컵 가장자리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얘기해도 안 화낼 거지?”라고 먼저 조건을 붙였다. 그 순간 서이현은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스텔라가 저런 말을 할 때는 대체로 그의 심기를 건드릴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등을 의자에 붙였다. 여유로운 척하는 자세였으나 눈은 이미 그녀에게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말해봐. 듣고 내가 화낼지 안 낼지는 내가 판단해.”

스텔라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러다 생각보다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오빠가 행복했던 순간이 알고 싶어.”

 

서이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텔라는 그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여행하면서 정말 좋았던 순간이라든지, 무슨 일을 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어떤 때 자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지 그런 것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다 잠깐 눈을 피하며, 그런 걸 묻다 보면 전 아내와 함께 있었던 행복한 기억도 나올 것 같아 자신이 좀 질투날 것 같다는 말까지 솔직하게 덧붙였다. 괜히 옛날 일을 떠올리게 하면 이현도 속상할 것 같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캐묻지는 않을 거라고. 다만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은 하나라고 했다. 서이현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으로 행복해지는지.

 

행복.

그 단어가 서이현에게는 지나치게 낯설었다.

 

원하는 것은 많았다. 진급하고 싶었다. 더 높은 자리에 가고 싶었고,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싶었고,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결국 누가 위에 서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 욕망들은 너무 선명해서 굳이 이름 붙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행복했냐고 묻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성공했던 순간과 행복했던 순간이 정말 같은 것인지, 그는 한 번도 진지하게 구분해본 적이 없었다. 카페 안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오래된 LP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유리컵 안에서 얼음이 녹아 움직이는 소리까지 이상하게 또렷했다. 서이현은 시간을 벌듯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담장 아래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스텔라는 웃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오히려 사람을 더 솔직하게 만들었다. 서이현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다시 돌렸다. 늘 얼굴 위에 얹고 있던 비웃음과 나른함이 조금 벗겨진 채였다.

 

“없어.”

 

스텔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기억이 안 나.”

 

잠시 생각했다. 진급했을 때. 누군가를 제치고 원하는 자리로 올라갔을 때.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을 실제로 쥐었을 때. 그 순간마다 분명 기분은 좋았다. 살아 있다는 감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행복이라기보다 숨을 오래 참고 있다가 잠깐 들이마시는 공기에 가까웠다. 곧바로 다음 목표가 생겼으니까.

 

“진급했을 때 좀 숨 쉬는 기분이었나.”

 

그는 자기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모르겠다.”

 

스텔라는 한동안 그를 보았다. 그러다 아주 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행복했던 적이 적었던 건, 앞으로 그만큼 더 자주 행복이 오려나 보다. 곧 소령 진급도 하겠다.” 소령이라는 단어에 여전히 몸은 반응했다. 손끝에 아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오랫동안 자신이 바라본 자리였고, 수많은 선택을 정당화해준 목표였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단어가 예전처럼 가슴 한가운데를 세게 때리지 않았다. 어쩌면 행복이라는 말 바로 뒤에 붙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건 행복이 아니라 결과지.”

 

말하고 나서 오히려 자신이 조금 놀랐다.

“진급은 목표야. 목표를 달성하면 그다음이 또 생겨. 항상 그래왔어.”

 

스텔라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과정도, 결과도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인 거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다. 평소 같았으면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한참 비꼬았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반박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서이현은 물기 맺힌 잔 표면을 엄지로 훑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뭐. 네 옆에 있으면 내가 행복해질 거라는 거야?”

스텔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대단한 자신감이네. 소위 주제에.”

“이번 여행은 내가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줘야지.”

 

장난처럼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서이현의 손가락이 잔 위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그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곧장 스텔라의 점심 먹던 모습을 들먹이며 빈정거렸다. 장어를 양볼 가득 넣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년이 무슨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냐고. 스텔라는 오히려 그것도 행복 아니냐며 웃었다. 그리고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거를 눈에 비추는 모든 순간 하나하나가 다 행복이 되지 않겠어.”

그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남았다.

 

서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곧장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스텔라는 때때로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 안에 오래 남을 말을 던졌다. 자신은 평생 말을 계산해왔다. 어떤 말이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책임을 피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압박을 주어야 원하는 답을 받아낼 수 있는지. 그런데 스텔라는 그런 계산 없이도 그의 안쪽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정작 말을 던진 본인은 그게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모르는 얼굴을 했다.

 

“너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고 다니지.”

농담의 형식을 빌리려 했는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아졌다. 스텔라가 눈을 깜빡였다.

 

“응?”

“그런 거 나한테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왜?”

 

서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커피잔을 들었다. “익숙해지잖아.”

스텔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익숙해지면 왜 안 돼?”

 

그 질문은 너무 곧아서 피할 곳이 없었다. 서이현은 한참 동안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밝은 카페 창가의 빛 속에서 스텔라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맑았다. 그 안에 자신의 얼굴이 아주 작게 비쳐 있었다.

 

“그러면.”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네가 없어졌을 때 비교가 되니까.”

 

말이 나온 뒤에야 자신도 그것을 들었다.

너무 솔직했다.

 

서이현은 곧바로 커피를 마시며 말을 덮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데 스텔라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엉뚱한 곳을 물었다. “내가 왜 없어져? 나 쓸모없어?” 순간 서이현의 얼굴이 확 굳었다. “아니, 씨발. 그런 뜻이 아니잖아.” 손바닥이 테이블을 탁 쳤다. 옆 테이블의 손님이 흠칫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쓸모. 그 말이 이상하게 속을 긁었다. 자신이 스텔라에게 가장 오래 가르쳐온 기준이 바로 그것이라서 더 그랬다. 일을 잘해야 가치가 있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야 곁에 둘 이유가 있고,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버려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취급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그래서 스텔라가 아무렇지 않게 ‘나 쓸모없어?’라고 물을 때마다 서이현에게는 과거의 자신이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는 결국 길게 숨을 내쉬었다.

 

“비유잖아. 넌 왜 맨날 문맥을 잘라먹어.”

 

스텔라는 잠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번에도 너무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튼 내가 왜 오빠를 떠나. 나이를 생각해봐. 오빠가 날 먼저 두고 하느님 품에 가는 게 더 빠르지. 상식적으로.”

 

그 말에는 서이현도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열두 살 차이. 통계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사람을 앉혀두고 죽을 순서를 자연스럽게 계산하는 태도가 기가 막혔다.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낮게 욕을 삼켰다. 아니 애초에, 죽고 살고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잖아.

 

“야. 나 아직 마흔도 안 됐어. 죽을 얘기 좀 그만해.”

스텔라가 웃었다.

“그리고 네가 날 먼저 떠나긴 어딜 떠나.”

그 다음 말은 거의 반사였다.

 

“내 허락 없이.”

 

말이 떨어지자 둘 사이에 아주 짧은 침묵이 생겼다. 부관 시절의 목소리였다. 스텔라를 자신의 수족으로 여기던 때, 그녀가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는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믿던 남자의 말투. 서이현 역시 그것을 알아챘다. 입 안쪽이 조금 씁쓸해졌다.

 

“……습관이야.”

그는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지금 그 뜻으로 한 말 아니니까.”

 

스텔라는 그의 얼굴을 잠시 보았다.

그리고 그가 가장 듣기 싫으면서도 가장 듣고 싶었던 방식으로 대답했다.

 

“알아.”

 

그 한마디 때문에 서이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페를 나왔을 때는 오후라고 부르기에는 해가 제법 많이 기울어 있었다. 낮 동안 흰빛에 가까웠던 햇살은 어느새 주황색을 띠고 있었고, 골목의 오래된 간판과 건물 벽에 비스듬히 걸렸다. 여전히 더웠지만 한낮처럼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건물 사이에 고여 있던 열기가 조금씩 빠져나갔고, 멀리서 바다 냄새인지 강 냄새인지 모를 축축한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서이현은 카페 문을 나서며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확인하려다 손을 멈췄다. 조금 전 스텔라가 나한테 집중하라고 했던 말이 아직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고작 몇십 분 사이에 사람이 달라질 리는 없어서 주머니 안의 진동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꺼내보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스텔라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어쩐지 오늘만큼은 그 믿음에 기대도 될 것 같았다.

 

스텔라는 카페를 나오자마자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잠깐 쉬었으니 충분하다는 듯 가방끈을 고쳐 메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연스럽게 서이현의 손을 잡았다. 이현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낮에는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놓칠까 봐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길이 조금 한산했고 놓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스텔라는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을 끼워왔다. 그 무의식적인 동작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사람은 익숙해지면 의식하지 않는다. 손을 잡는 것도, 옆자리에 앉는 것도, 물을 따라주는 것도, 상대가 뒤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것도. 조금 전 카페에서 자신이 입 밖으로 내놓았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없어졌을 때 비교가 되니까. 그런데 정작 그는 이미 아주 많은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여기서 좀만 걸으면 돼.”

앞서 걷던 스텔라가 말했다.

 

“또?”

 

반사적으로 투덜거렸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카페에서 쉬며 다리가 조금 풀리기는 했다. 스텔라가 뒤를 돌아보고 웃었다.

 

“오늘 좀 더 힘써야 하는데. 괜찮아?”

“무슨 힘을 써.”

“그건 이따가.”

 

그 말에 서이현의 눈이 조금 좁아졌다. 아까부터 계속 이따가였다. 장어집에서도 저녁에 할 일이 있다고 했고, 카페에서도 뭔가 보여주겠다고 했고, 지금도 또 말을 아꼈다. 평소라면 타인의 비밀을 기다려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알려고 마음먹으면 알아냈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료를 뒤지거나, 사람을 닦달하거나, 상대가 먼저 입을 열게 만들었다. 그런데 스텔라에게만큼은 이상하게 기다리는 쪽이 되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자기가 준비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얼굴을 할 때마다 그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어서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뭔데.”

 

그래도 한번은 물었다.

스텔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 엠바고.”

 

서이현은 걸음을 멈추진 않았지만 고개만 천천히 돌렸다.

 

“너 그거 군 정보보안용어야.”

“알아.”

“개인 데이트 일정에 갖다 쓰는 말 아니야.”

“군인 커플인데 뭐.”

 

기가 막혀서 웃음이 샜다. 그럼에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스텔라는 그가 결국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앞으로 향했다. 서이현은 그 웃음을 보며 혀로 어금니 안쪽을 밀었다. 저 웃음은 무언가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자신만 모르는 무언가를 품고 있으면서 그 사실 자체를 즐기는 얼굴. 예전의 서이현이라면 가장 싫어했을 표정이었다. 자신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을 상대가 저렇게 태연하게 드러내는 것은 통제권을 침범하는 일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궁금했고, 그보다 더 기대됐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서이현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아. 엠바고.”

 

스텔라가 돌아봤다.

그가 검지를 하나 세웠다.

 

“대신 별거 아니면 각오해.”

“어떻게 할 건데?”

“그건 나도 엠바고.”

 

스텔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서이현도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곳은 낮의 장어집보다 조금 더 시끌벅적했다. 철판마다 몬자야키가 익고 있었고, 손님들의 말소리와 주걱이 철판을 긁는 소리, 주방에서 튀어나오는 일본어가 좁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스텔라는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를 보며 꽤 진지하게 고민했고, 서이현은 그 사이 사케가 적힌 부분부터 찾아냈다. 한 병쯤 마셔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가락으로 메뉴를 짚으려는데 맞은편에서 스텔라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독한 술 안 돼.”

서이현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왜.”

“이따가 걸어야 돼.”

“또 걷는다고?”

“조금.”

“조금이 몇 분인데.”

“……20분?”

 

그 숫자를 듣는 순간 서이현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굳었다. 오늘 하루 동안 스텔라가 말한 ‘조금’과 ‘금방’과 ‘이것만’이라는 표현들이 실제로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인지 몸으로 배운 뒤였다.

 

“너 아까도 삼십 분이라며 한 시간 걸었어.”

“구경했잖아.”

“그건 걷는 시간에 포함 안 시켜?”

“여행은 원래 그런 거야.”

 

또 여행이라는 말이었다. 그것 하나면 온갖 비효율이 정당화되는 신기한 세계. 서이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결국 사케 대신 하이볼을 시켰다. 스텔라도 같이 한 잔을 주문했고, 몬자야키가 익는 동안 둘은 별 쓸모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낮에 들렀던 가게 중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스텔라가 산 물건 중 절반은 한국에도 파는 것 아니냐는 것, 가챠에 쓴 돈을 따져보면 차라리 완제품을 사는 게 더 싸지 않았겠느냐는 것. 서이현은 계산의 비효율을 꼬집었고 스텔라는 그럼 재미가 없다고 했다. 이야기는 시시했다. 업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기억해두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이현은 스텔라가 조금 전 어떤 가게에서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두 번째 하이볼이 도착했을 때 스텔라가 “이따가 절대 후회 안 할걸?” 하고 말했다. 서이현은 잔을 들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데.”

“비밀.”

“또.”

“조금만 참아.”

 

서이현은 몬자야키 위로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스텔라를 빤히 바라봤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말 별것 아닌데 자신만 혼자 기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자존심 상했다. 그는 하이볼을 길게 한 모금 마셨다. “야,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 예전의 자신이라면 꽤 서늘하게 했을 말이었다. 비밀은 곧 자신이 모르는 영역이고, 자신이 모르는 영역은 위험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텔라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연애를 하고 난 뒤부터 그의 목소리에 섞인 것들을 꽤 정확하게 구분하게 된 모양이었다. 진짜 명령인지, 습관적 으름장인지, 그냥 자기한테 관심을 달라는 투정인지.

 

서이현은 그 사실이 조금 불만스러웠다.

자신이 이렇게 쉽게 읽히는 사람이 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상대가 스텔라라면, 이상하게도 완전히 싫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거리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낮에는 뜨거운 햇빛에 바랜 것처럼 보이던 골목에 가로등이 켜졌고, 가게마다 내건 작은 등불과 네온사인이 하나둘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늘 끝에만 얇게 주황빛이 남아 있었고 건물 위는 이미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바람도 낮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서이현은 배가 부른 탓에 조금 느슨해진 걸음으로 스텔라 옆을 걸었다. 이렇게 하루를 꽉 채워 돌아다니고 저녁까지 밖에 있는 일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군인이기 전에 자신이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살아오면서 점점 그렇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웠고, 민호가 있으면 아버지 역할을 했으며, 혼자 있으면 다음날을 준비했다. 하루를 즐기는 것보다 하루를 버리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 무엇인가가 있었다.

쓸데없이 많이 걸었고, 많이 먹었고, 별것도 아닌 물건에 돈을 썼고, 웃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스텔라는 말했다.

 

“그래서. 어디 가는 건데.”

결국 또 물었다.

 

스텔라는 잠깐 그를 올려다보았다. 184센티미터와 163센티미터. 늘 그래왔듯 고개를 한참 들어야 눈이 마주쳤다. 서이현은 그 각도가 익숙했다. 몇 년 동안 자신은 늘 스텔라를 내려다봤다. 단지 지금은 그 시선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이 달랐다. 예전에는 평가하고 재고 명령하기 위해 내려다봤다면, 요즘은 저 작은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고 싶어서 내려다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스텔라는 그를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어깨, 팔, 긴 다리.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 있겠지.” 서이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가 있어.”

“아무것도.”

“야. 말을 하다 말아.”

 

스텔라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작은 골목 앞에서 멈췄다.

서이현은 고개를 들어 간판을 읽었다.

읽을 수 없는 일본어 아래에 영어가 작게 적혀 있었다.

 

KIMONO RENTAL.

 

유리문 너머에는 다양한 색의 유카타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스텔라를 봤다. 간판을 봤다. 다시 스텔라를 봤다.

 

“유카타?”

 

스텔라가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현은 자신의 몸을 한번 내려다봤다. 짧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과 넓은 어깨, 일반인보다 확연히 큰 체격. 그리고 유리창 안에 마네킹처럼 얌전히 걸려 있는 얇은 천 조각들.

 

“잠깐.”

목소리에 진심으로 황당함이 묻어났다.

 

“나보고 저걸 입으라고?”

“응.”

“왜.”

“여름 일본 왔잖아.”

“그래서.”

“여름 일본이면 유카타 입어야지.”

 

여행이라는 말에 이어 이제는 여름 일본이라는 이유까지 생겼다. 서이현은 입술을 한번 비틀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직원이 문을 열며 밝게 인사했고, 스텔라는 기다렸다는 듯 능숙하게 일본어로 예약했다고 말했다. 서이현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꽂혔다.

 

“예약?”

“응.”

“언제 했어.”

“한국에서.”

“내 것도?”

“二人予約しました、チョン・ステラです。 (두 명 예약했는데요, 정스텔라로 했습니다.)”

 

너무 태연해서 할 말이 없었다. 직원이 안쪽으로 안내했고, 스텔라는 익숙하게 뒤따랐다. 서이현은 입구에 잠깐 서 있다가 결국 따라 들어갔다. 벽마다 유카타가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흰색, 파란색, 검은색, 연한 분홍색, 짙은 자주색. 꽃무늬와 물결무늬, 학과 대나무, 여름 풀꽃 같은 것들이 천 위에 흩어져 있었다. 서이현이라면 평생 자발적으로 들어올 일이 없었을 공간이었다. 직원이 그의 예약 이름이 붙은 옷을 꺼내왔다. 짙은 파란색 위로 은색 학이 흐르는 유카타였다. 서이현은 그것을 펼쳐보며 눈을 좁혔다.

 

“이거 짧은 거 아니야?”

“아닐걸?”

“너 나 키 몇인지 적었어?”

“184.”

“체격은?”

“크다고 했어.”

“뭐라고.”

 

스텔라가 웃음을 참으며 자기 옷을 받아들었다. 그녀의 것은 밝은 노란색이었다. 서이현은 그 색을 보자 잠깐 시선이 멈췄다.

 

“노란 거 입어?”

“응. 예쁘지?”

 

대답은 바로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유카타를 든 채 스텔라를 한 번 더 봤다.

 

“내가 괜히 서이현 대위 부관이야?”

 

그녀가 장난스럽게 찡긋 웃었다.

서이현은 순간 말을 잃었다.

 

부관.

 

그 단어는 아직도 둘 사이에서 이상한 울림을 남겼다. 과거에는 자신이 지시했고 스텔라가 준비했다. 출장 일정도, 자료도, 옷도, 식사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하면 스텔라는 갖다놓았다. 지금도 그녀는 자신이 입을 옷을 미리 골랐고 치수까지 알아보고 예약해두었다. 겉으로 보면 비슷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시킨 것이 아니었다. 스텔라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서이현은 아무 말 없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유카타를 입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허리였다. 설명서를 보며 오비를 한 바퀴 둘렀는데 매듭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다시 풀었다. 두 번째에는 그럭저럭 된 것 같았는데 거울로 보니 한쪽이 축 늘어져 있었다.

 

“씨발.”

 

낮게 욕을 했다. 세 번째 시도.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장을 메고 로프 매듭을 묶는 것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는데 얇은 천 하나를 정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사람을 묘하게 열받게 했다. 결국 서이현은 커튼 너머를 향해 불렀다.

 

“야.”

 

대답이 없었다.

조금 크게.

 

“정스텔라.”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거 묶는 거 도와줘.”

“나도 지금 입는 중이야.”

“와서 해.”

“사장님이 도와주실걸?”

 

서이현은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밖에 있던 사장이 떠올랐다.

남자였다.

 

“남자가 내 허리를 만져?”

 

자기가 말하고도 이상한 논리였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그것이 가장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그는 기다리다 못해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유카타는 제대로 여미지 않은 탓에 한쪽 어깨가 조금 내려가 있었고, 오비는 허리에서 반쯤 풀려 늘어졌다. 건너편에서 직원의 도움을 받던 스텔라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다 벗었잖아?”

 

서이현이 자기 상태를 내려다봤다. 말 그대로 다 벗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변명의 여지가 많지도 않았다.

 

“벗은 게 아니라 갈아입은 거야.”

태연하게 말한 뒤 스텔라를 턱으로 가리켰다.

 

“빨리 와서 묶어.”

“나도 입는 중이라니까.”

“저 사람한테 말해.”

 

스텔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사장에게 일본어로 무언가를 물었다. 서이현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장이 자신과 스텔라를 번갈아 보고는 웃는 것만은 확실히 보았다. 나이 든 남자는 기분 좋은 얼굴로 무언가 대답했다. 스텔라가 이현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남자친구가 자기가 묶어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직접 가도 되냐고 했어.”

 

서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 왜 그렇게 말해.”

“틀린 말 아니잖아.”

“내가 언제 바란다고 했어.”

“그럼 사장님 부를까?”

“됐어.”

 

대답은 즉시 나왔다. 스텔라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탈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 서자 작은 공간이 갑자기 더 좁아졌다. 서이현은 벽에 등을 기대고 두 팔을 조금 벌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스텔라의 손이 그의 옷깃을 정리했다. 흐트러진 천을 당겨 겹치고, 허리 주변을 한번 매만진 뒤 오비를 다시 감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꽤 능숙했다.

 

“잘하네.”

“아까 직원분이 해주는 거 봤거든.”

“그걸 한 번 보고 해?”

“나 누구게.”

 

그 말에 웃음이 나려다 말았다. 스텔라의 손이 허리를 감고 지나갔다. 옷 위인데도 이상하게 감각이 선명했다. 서이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불현듯 아주 오래전 같기도 하고 불과 얼마 전 같기도 한 장면들이 겹쳤다. 밤늦게 관사에서 그의 셔츠를 다려놓던 스텔라. 단추 하나가 잘못 채워졌다며 가까이 와 다시 고쳐주던 손. 넥타이가 비뚤어졌다며 말도 없이 바로잡던 모습. 그때의 자신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부관이니까. 자신의 손과 발처럼 써도 되는 사람이니까.

 

“예전에도 이랬지.”

 

말이 불쑥 나왔다.

스텔라의 손이 잠깐 멈췄다.

 

“뭐가?”

“내 옷 만져주는 거.”

 

그는 조금 생각하듯 말을 이어갔다.

“다림질하고, 단추 채우고, 넥타이 고쳐주고.”

 

예전에는 시켜서.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둘 다 알았다.

스텔라가 다시 오비를 당겼다.

서이현은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아주 가볍게.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거리가 가까웠다.

 

“그때는 시켜서 한 거고.”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지금은?”

 

몇 초간 시선이 마주쳤다.

스텔라는 이상할 정도로 쉽게 웃었다.

 

“지금은 내가 원해서.”

 

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만 천천히 거두었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원해서.

 

자신이 명령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제 옆에 있고, 자신을 챙기고, 옷을 골라주고, 이렇게 허리를 감아 매듭을 만들어준다는 것. 아주 오랫동안 그는 누군가를 곁에 두기 위해 힘과 약점과 필요를 이용했다. 상대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곧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스텔라는 지금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 있었다. 그 사실은 서이현에게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안정감을 주었다.

 

오비가 단단하게 묶였다.

스텔라가 한 걸음 물러나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됐다.”

 

서이현도 거울을 봤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두운 파란색은 피부와 잘 맞았고 은색 학 무늬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았다. 체격 때문에 옷이 조금 팽팽해 보이기는 했지만 우려했던 것처럼 우스꽝스럽지는 않았다.

 

“괜찮네.”

 

자기가 말하고도 조금 기분이 풀렸다. 그리고 몇 분 뒤 스텔라가 자기 옷까지 다 입고 나왔다. 서이현은 거울을 보던 얼굴 그대로 멈췄다.

 

노란색. 처음에는 너무 밝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스텔라가 입으니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밝은 피부 위로 따뜻한 색이 얹혔고, 평소 단정했던 단발 머리에 컬을 넣었다. 머리 장식도. 부대에서 늘 단정하게 정리된 군복만 보다가 얇은 유카타 자락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사람 자체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생각보다 오래 쳐다봤다. 스텔라가 먼저 눈치를 챘다.

 

“왜.”

 

서이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한번 깜빡였다.

 

“……야.”

“응?”

 

입이 먼저 움직였다.

“너 지금 되게 예쁘다.”

 

스텔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말하고 난 뒤 오히려 서이현이 더 불편해졌다. 너무 직접적이었다. 평소 같으면 괜찮네, 나쁘지 않네, 잘 골랐네 정도로 끝낼 말을 고스란히 내뱉었다. 괜히 헛기침을 했다. “사진 찍어줄까.” 스텔라가 웃었다.

 

“밖에서?”

“여기서 찍냐 그럼.”

 

그렇게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거의 어두워져 있었다. 유카타 차림의 사람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눈에 띄었다. 스텔라는 처음에는 가게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서이현은 사진을 잘 찍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휴대전화를 들자 생각보다 구도에 집착했다. 뒤에 사람이 지나가면 기다렸고, 간판이 머리 위로 겹치면 위치를 옮기라고 했다. 스텔라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투덜거리면 사진 찍어달라면서 가만있으라는 말을 했다. 결과물은 제법 괜찮았다. 스텔라가 화면을 보며 만족해하자 서이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사실 스텔라가 모르는 사진이 이미 오늘 하루 동안 꽤 많이 쌓여 있었다.

 

길을 걷는 뒷모습.

신호등 아래 서 있던 얼굴.

가챠 캡슐을 열며 웃던 순간.

창가에 앉아 있던 옆모습.

 

그런 사진은 보여주지 않았다.

보여주면 왜 몰래 찍었냐고 물을 게 뻔했고,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직은 몰랐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스텔라가 말했다.

 

“아. 아까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 있잖아.”

 

서이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장어집 가면서?”

“응.”

 

그는 기억을 뒤졌다.

저녁에.

비밀.

하고 싶은 일.

유카타.

걸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순간,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사고가 튀었다.

서이현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스텔라의 뒷모습을 봤다.

 

노란 유카타.

예쁘게 세팅한 머리.

저녁의 골목.

자신과 둘뿐인 여행.

 

그리고 아까부터 굳이 비밀이라고 강조한 무엇인가.

 

“……설마.”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스텔라가 고개를 돌렸다.

 

“응?”

“진짜 그거 하려고 여기 온 거야?”

“뭘?”

 

서이현은 주변을 한번 훑었다. 사람은 제법 있었지만 골목 하나만 들어가면 어두운 곳이 많았다. 일본의 오래된 거리 특유의 좁고 긴 골목들. 그 생각을 하자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이거 입고?”

 

스텔라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그 표정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배짱 많이 컸다, 정스텔라.”

“뭔 소리야?”

“밖에서 하겠다고?”

 

스텔라가 눈을 끔뻑였다.

 

“뭘 밖에서 해.”

 

그제야 뭔가 이상했다. 서이현이 입을 다물었다. 스텔라는 가방을 열고 안을 한참 뒤적이더니 검은 유선 이어폰 하나를 꺼냈다. 선이 길게 풀려나왔다. 한쪽을 자기 귀에 꽂고, 다른 한쪽을 서이현에게 내밀었다.

 

“응? 오빠 뭐라고 했어? 잘 안 들려서.”

 

서이현은 그 이어폰을 내려다봤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자신이 몇 초 전까지 생각하던 장면들이 무참하게 무너졌다. “……그거 하자는 게 아니었어?” 스텔라가 더 혼란스러운 얼굴이 됐다. “그거 뭐?” 서이현의 뒷목이 조금 뜨거워졌다. 마흔을 앞둔 남자가 혼자 어디까지 상상을 펼쳤는지 생각하니 민망함이 뒤늦게 몰려왔다. 그는 이어폰을 거의 빼앗듯 받아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텔라는 여전히 의심스럽게 바라봤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애플뮤직에 저장된 플레이리스트가 떴다.

 

[일본 여행!!]

 

느낌표까지 두 개였다. 서이현은 그것을 보고 잠깐 헛웃음을 흘렸다. 곧이어 이어폰 안으로 일본 노래가 흘러들었다. 밝고 빠른 멜로디였다. 일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여행지의 저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스텔라는 익숙한 노래인지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어폰 선 하나가 이어져 있었다.

 

평소보다 멀리 걸으면 선이 당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간격도 가까워졌다.

서이현은 아까의 민망함을 감추려 괜히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래서 이 노래 들으면서 뭘 하자는 건데.”

“걷는 거.”

“……그게 끝이야?”

“일단은.”

“설마 이대로 숙소까지 걸어가는 거 아니지?”

“아니야.”

“얼마나 더 가.”

 

스텔라는 잠깐 계산하는 얼굴을 했다.

 

“진짜 20분.”

 

서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망할 20분 소리를 오늘 몇 번째 듣는지 알아?”

스텔라가 웃었다.

“노래 네 곡.”

“뭐?”

“네 곡만 들으면 돼.”

 

서이현은 잠깐 생각했다.

이어폰에서는 첫 번째 노래의 후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좋아.”

그가 손가락 네 개를 폈다.

“딱 네 곡.”

스텔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번째 넘어가면.”

그는 진심으로 경고하는 얼굴을 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거니까 알아서 해.”

 

스텔라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서이현도 별다른 투덜거림 없이 보폭을 맞췄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뒤의 도시는 낮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게 처마마다 작은 등이 켜졌고, 어두워진 하늘 아래 전봇대와 전선이 검은 선처럼 얽혀 있었다. 노란 유카타 자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파도처럼 흔들렸다. 그 옆으로 자신의 파란 소매도 함께 움직였다. 이어폰 안에서는 자신이 평소라면 굳이 찾아 듣지 않을 노래가 흘렀다. 한쪽 귀로는 음악이, 다른 한쪽 귀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자동차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들어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쪽 귀를 누군가와 나누어 가진 것 같았다. 완전히 자기만의 소리도 아니고, 완전히 상대의 것도 아닌 시간. 스텔라는 노래가 바뀔 때마다 이건 자기가 좋아하는 곡이라고 알려주기도 했고, 후렴이 좋다며 조금만 들어보라고 괜히 그의 팔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서이현은 일본어를 모르니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다음 곡이 넘어가도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첫 곡이 끝났다.

 

두 번째.

 

세 번째.

 

처음에는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잊었다.

사람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카타 차림이 유난히 눈에 띈다고 생각했는데, 거리를 걸을수록 같은 차림의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린아이 손을 잡은 가족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떠드는 여자애들도 있었고, 서로 부채질해주는 연인도 있었다. 길가에는 간이 노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달콤한 소스 냄새와 기름 냄새가 바람에 섞여 왔다. 서이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눈을 좁혔다.

 

뭔가 있었다.

스텔라가 굳이 말하지 않는 무언가.

하지만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잡고 있는 손에 힘만 아주 조금 주었다.

스텔라가 그 감각을 느꼈는지 옆을 돌아봤다.

 

“왜?”

 

서이현은 앞을 향한 채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 전 스텔라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멀리서 강 냄새가 훨씬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길 끝 너머로,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서이현은 그제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종일 스텔라가 숨기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직접 보여주기를 기다렸다.

오늘만큼은 그 과정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https://youtu.be/aTiuJGBmR30?si=9_o1jwzBqVG5r46v

 

 

 

강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저 저녁 산책을 나온 이들이겠거니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유카타 차림의 여자들이 부채를 들고 지나갔고, 어린아이들은 작은 주머니를 흔들며 부모의 손을 잡고 뛰었다. 모퉁이마다 임시로 세운 노점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소스가 눌어붙는 달큰한 냄새와 기름에 무언가를 튀기는 냄새, 설탕을 녹인 과일 사탕 냄새가 축축한 여름 공기 속에 뒤섞였다. 길가에는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멀리 보이는 강둑 주변은 이미 움직이는 사람들의 머리로 까맣게 메워져 있었다. 서이현은 그 광경을 보며 조금 전부터 어렴풋이 떠오르던 짐작을 이제 거의 확신했다. 그런데도 모르는 척했다. 옆에서 걷는 스텔라가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킬까 봐 애써 태연한 사람 특유의 과장된 무심함. 무엇보다 스텔라는 흥분하면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지금도 그랬다. 손을 잡은 채 반 걸음 앞서가는 작은 체구가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자신을 끌고 갔다. 서이현은 그 손을 빼지도, 먼저 답을 말해 김을 빼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처음으로, 결과를 이미 예상하면서도 굳이 그 전에 있는 시간을 건너뛰고 싶지 않았다.

 

이어폰 안에서는 네 번째인지 다섯 번째인지 이제는 세지도 않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는 다섯 번째 곡이 넘어가면 길바닥에 주저앉겠다고 으름장을 놓아놓고 정작 서이현은 그것이 몇 곡째인지 잊은 지 오래였다. 스텔라는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길가에서 사과사탕을 파는 노점을 발견하면 잠깐 고개를 돌렸고, 물풍선 낚시 앞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모습을 보면 걸음을 조금 늦췄다. 그럴 때마다 둘 사이에 이어진 검은 이어폰 선도 느슨해졌다 팽팽해졌다를 반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답답해서 진작 빼버렸을 물건인데, 이상하게도 이현은 계속 귀에 꽂고 있었다. 한쪽 귀로는 낯선 노래가, 다른 한쪽 귀로는 축제의 소음이 들어왔다. 그리고 손바닥에는 스텔라의 손이 있었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건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 쓸데없는 감각을 많이 남기는 일인지도 몰랐다. 목적지 하나만 기억하면 될 일을, 냄새와 음악과 손의 온도까지 전부 기억하게 만드는 것.

 

“여기.”

스텔라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또 어디 가.”

 

서이현은 반사적으로 투덜거렸지만 이미 끌려가고 있었다. 넓은 강변 쪽은 사람으로 빼곡했다. 그나마 앞이 잘 보이는 곳은 돗자리가 일찌감치 깔려 있었고, 뒤쪽에는 서서라도 보려는 사람들이 겹겹이 모여 있었다. 서이현은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미간부터 찌푸렸다. 훈련장에서 수백 명이 움직이는 모습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이런 곳의 인파는 유난히 싫어했다. 목적도 없고 통제도 안 되는 사람들이 각자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질색이었다. 누군가 앞에서 갑자기 멈추고, 아이가 뛰어들고, 어깨가 부딪히고, 옆에서는 사진을 찍겠다고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스텔라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야. 그냥 여기서 봐. 더 들어가지 마.”

“잠깐만.”

“뭘 잠깐만이야. 사람을 봐.”

 

스텔라는 대답 대신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부대에서 자료를 찾을 때도 저랬다. 남들이 놓친 숫자 하나를 찾아낼 때, 복잡한 규정 사이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문장을 골라낼 때, 몇십 장짜리 보고서 안에서 원하는 근거를 뽑아낼 때 스텔라는 저런 눈을 했다.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반드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사람의 눈. 서이현은 어이가 없어 잠깐 웃었다. 엘리트 장교로 뽑힌 인간의 정보 수집 능력이 일본 불꽃놀이 명당을 찾는 데까지 쓰이고 있었다.

 

“저기.”

 

스텔라가 강변 옆으로 조금 솟은 둔덕을 발견했다. 큰 나무와 낮은 울타리 때문에 정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는데, 막상 가까이 가보니 강 쪽 시야는 이상할 정도로 트여 있었다. 사람도 앞쪽보다 훨씬 적었다. 스텔라는 승리한 사람처럼 그의 손을 끌었다.

 

“봐. 자리 있잖아.”

서이현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 건 또 귀신같이 찾아.”

“내가 누구게.”

“그래. 정스텔라 소위님 대단하십니다.”

빈정거렸지만 이번에는 진심이 조금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둔덕 가장자리 쪽에 자리를 잡았다. 강 수면은 밤빛을 받아 검게 보였고, 맞은편 건물의 불빛만 길게 흔들렸다. 바람이 강을 타고 불어오자 하루 종일 피부에 붙어 있던 열기가 처음으로 조금 식는 것 같았다. 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보고, 휴대전화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어폰을 빼어 가방에 넣었다. 서이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이제는 다 티가 났다.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했고, 몸은 이미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강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제 시작일 거야.”

그 말에 서이현이 일부러 모르는 척 눈썹을 들었다.

“뭐가 시작이—”

 

펑.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굉음이 공기를 때렸다. 소리가 먼저 가슴팍을 울렸다. 서이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밤하늘 한복판에 붉은 빛 하나가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크게 벌어졌다. 불꽃은 둥근 꽃처럼 피어났다가 수백 갈래로 갈라져 천천히 아래로 쏟아졌다. 붉은 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 옆에서 노란 불꽃이 터졌고, 다시 조금 높은 곳에서는 푸른 빛이 퍼졌다. 잔해가 별가루처럼 허공에 남아 있는 동안 강 수면에도 같은 색이 번졌다. 검은 물 위에서 불꽃이 한 번 더 피었다가 물결과 함께 길게 찢어졌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한꺼번에 터졌다. 서이현은 잠깐 말을 잊었다.

 

불꽃놀이 자체가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행사장에서 본 적도 있었고, 멀리서 지나가며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행사가 끝나면 언제 빠져나갈지 생각했고, 휴대전화로 들어오는 연락을 확인했으며, 옆에 있는 사람과 다음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준비한 불꽃을 올려다본 것은 아마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하루 동안의 이상한 조각들이 전부 한곳에 맞아 들어갔다. 저녁에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던 말. 굳이 비밀이라고 했던 이유. 유카타를 예약해둔 것. 사케를 말리고 하이볼만 마시게 한 것. 다리가 아프다는데도 20분만 더 걸으면 된다고 했던 것. 일본 여행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하고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낀 것.

다 이것 때문이었다.

 

서이현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뒤로는 다시 하늘을 보지 못했다.

스텔라가 보고 있었다.

불꽃을.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힌 채 아무런 경계도 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그 얼굴 위로 다른 색의 빛이 흘렀다. 붉은 불꽃이 피면 뺨과 코끝이 잠깐 붉어졌고, 푸른빛이 터지면 밝은 피부가 희고 차갑게 빛났다. 눈동자 안에는 작은 불꽃들이 수없이 맺혔다 사라졌다. 낮에 입을 때만 해도 너무 밝은 색 아닌가 싶었던 노란 유카타는 밤이 되자 오히려 주변의 빛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강도, 어두운 하늘도, 사람들의 실루엣도 아닌 그 색만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 서이현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얼굴을 바라봤다.

 

아.

 

속으로 아주 짧은 탄식 같은 것이 나왔다.

 

이거였구나.

 

저 년이 오늘 하루 종일 그렇게 유난을 떤 이유.

자기가 불평할 때마다 이따가 후회 안 할 거라고 자신 있게 웃었던 이유.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자신이라면 결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꽃을 보러 가고 싶으면 그냥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했을 것이다. 유카타를 입고 싶으면 그날 가서 빌렸을 것이다. 음악도, 동선도, 저녁 술의 양도 하나하나 연결해놓는 수고를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가 같다면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을 고르는 것이 늘 그의 방식이었다.

 

스텔라는 정반대였다.

결과 하나를 위해 과정까지 예쁘게 만들어놓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낮에 카페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과정도 행복할 수 있잖아.

 

그때는 쓸모없는 소리라고 했다. 목표는 결과이고, 결과를 얻으면 다음 목표가 온다고.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는 무엇 하나 결과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장어를 먹었다. 쓸데없는 가챠에 돈을 썼다. 땀을 흘리며 시부야를 돌아다녔다. 이름도 모르는 카페에서 앙버터토스트를 먹고, 노트북도 없이 몇십 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유카타를 입었고, 일본 노래를 한쪽 귀씩 나누어 들으며 한참을 걸었다.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진급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권력을 늘려주지도 않았고, 미래를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몇 시간 전의 장면들이 벌써부터 선명했다. 장어를 먹으며 동그래졌던 스텔라의 눈, 가챠에서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아 부풀었던 볼, 카페 창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풍경을 보던 옆얼굴, 자신의 허리에 오비를 감아주던 손. 나한테 집중해,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목소리. 그리고 지금 제 앞에서 불꽃을 보며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는 얼굴. 과정이란 것이 정말 이런 것이라면, 스텔라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서이현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주었다. 스텔라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 다시 하늘이 크게 밝아졌다.

 

“진짜 예쁘다.”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라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스텔라가 한 걸음 가까워졌고, 사람들의 움직임에 밀린 것인지 자신이 원한 것인지 모르게 어깨를 이현 쪽으로 기대왔다. 그녀의 체중은 가벼웠다. 군복 위로 닿을 때와 달리 얇은 유카타 한 겹을 사이에 둔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이현은 가만히 있었다. 어깨에 기대오는 무게가 생각보다 선명했다. 주변은 시끄러웠다. 펑, 하는 폭발음이 몇 초 간격으로 가슴을 때렸고, 사람들이 환호할 때마다 수십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솟았다. 아이가 웃는 소리도 있었고 누군가는 옆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조금 전까지 나눠 끼고 있던 이어폰 속 노래는 아예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소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서이현은 이상하게 스텔라의 숨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아주 작은 것이었다. 불꽃이 크게 터질 때마다 조금 놀라 숨을 들이쉬고, 다음 불꽃이 올라갈 때까지 천천히 내쉬는 호흡. 제 팔과 닿은 어깨의 체온. 움직일 때마다 아주 희미하게 나는 향. 그 감각들 사이에서 서이현은 문득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불꽃놀이를 보러 왔는데 하늘을 안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우스웠다.

 

스텔라는 자신이 이렇게 쳐다보는 줄도 몰랐다. 완전히 무방비한 얼굴로 하늘만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경계가 없었다. 부대에서는 자신의 눈빛 하나가 달라져도 먼저 알아차리는 여자였다. 기분이 나쁜지, 무엇을 지시하려는지, 어떤 말을 삼키고 있는지 시선만으로도 읽어내던 스텔라가 지금은 제 얼굴에 불꽃이 비치는 것도 모르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 간극이 사람을 이상하게 자극했다. 평소 각 잡힌 군복을 입고 서류철을 품에 안고 있던 정스텔라와, 지금 노란 유카타 차림으로 제 어깨에 기대 밤하늘을 보고 있는 정스텔라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부관도 아니고, 필요한 일을 대신 처리하는 수족도 아니었다. 무엇을 시키지 않아도 곁에 있고, 자신이 원해서 여행을 준비하고, 자신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비밀을 만들고, 남는 것도 없는 하루에 돈과 시간과 마음을 쏟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내가 원해서.

 

유카타 가게에서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이 묘하게 가슴 안쪽을 건드렸다.

서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스텔라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말 짧았다. 입술이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 행동을 하고 난 뒤 자신이 조금 놀랐다. 계산하지 않았다. 스텔라가 좋아할지, 어떤 반응을 할지, 지금 하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런 일은 좀처럼 없었다. 스텔라는 하늘만 보고 있어서 알아챘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였다. 서이현은 그 모습에 아주 작은 웃음을 흘렸다.

 

“예쁘네.”

 

말은 낮았다. 스텔라가 불꽃을 향해 방금 했던 말에 답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하늘도 예뻤다. 강 위로 퍼지는 불꽃도 충분히 볼 만했다. 그런데 서이현의 눈은 여전히 하늘에 없었다. 스텔라의 옆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낮의 대화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떠올랐다.

 

이번 여행은 내가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줘야지.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소위가 대위를? 장어를 먹다가 양볼이나 부풀리는 년이?

 

그런데 지금은 그 대답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았다. 행복하냐고 누군가 지금 묻는다면 여전히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런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아직 낯간지러웠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을 하루 전으로 돌려놓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아무리 원하는 것을 많이 얻는다 해도 이 장면이 사라지는 것은 싫었다. 서이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한 답이었다.

 

불꽃이 연달아 터졌다.

하늘이 환해질 때마다 스텔라의 얼굴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서이현은 그 얼굴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욕심이 났다.

하늘만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오늘 하루를 준비한 사람도 스텔라였고,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도 스텔라였는데, 이상하게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을 봐줬으면 했다. 불꽃이 아무리 예뻐도 지금만큼은 저 눈 안에 자신이 들어갔으면 했다. 그 욕심은 아주 서이현다운 것이었다. 통제하고 싶고, 자신에게 시선을 두게 만들고 싶고, 좋은 것을 보고 있는 순간조차 그 중심에 자신이 있고 싶은 것.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는 그것을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숨길 필요가 없었다. 허리를 감싼 팔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스텔라의 몸이 조금 더 가까이 당겨졌다.

 

“야, 정스텔라.”

 

불꽃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스텔라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서이현은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하늘만 보지 말고.”

한 번 더 불꽃이 터졌다.

 

“여기 봐.”

 

스텔라가 그제야 뭔가 들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이 자신을 향했다.

 

“응? 나 불렀어? 미안, 잘 안 들려서…….”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멀어졌다.

 

아니, 실제로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폭죽은 계속 터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계속 환호했다. 그런데 서이현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로 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텔라의 눈 속에는 여전히 불꽃이 비쳤다. 붉은색, 금빛, 푸른색의 작은 점들이 동공 안에서 타닥타닥 피었다가 사라졌다. 자신을 보라는 말을 듣고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 조금 당황한 얼굴,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져 있는 것까지 가까이에서 보였다.

안 들리면 가까이 오면 되지.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스텔라를 제 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당겼다. 좁게 남아 있던 공간이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자신의 가슴팍에 닿았고, 스텔라의 눈이 놀라 조금 더 커졌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서이현은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처음에는 짧았다.

 

폭죽 하나가 하늘 끝에서 터졌다가 사라지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입술이 닿고, 스텔라가 놀라 숨을 멈추고, 서이현이 아주 조금 떨어졌다. 그대로 끝낼 생각이었다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몇 센티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스텔라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가쁜 숨을 한번 들이쉬는 것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훨씬 천천히.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곳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계속 누군가가 움직였고, 유카타 자락이 스치고, 아이들이 떠들었고, 밤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평소라면 모든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로 보일지부터 계산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타인의 눈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복잡한 인파 한가운데에서 스텔라를 이렇게 붙들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군에서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던 관계였고, 둘이 함께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할 순간이 더 많았다. 여기서는 아무도 자신들을 몰랐다. 대위도 소위도 아니었다. 어느 부대의 누구인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여행 온 연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 사실이 생각보다 좋았다.

 

서이현의 한 손이 스텔라의 뺨으로 올라갔다. 손바닥 안에 작은 얼굴 한쪽이 들어왔다. 엄지가 관자놀이 근처를 가볍게 스쳤고, 조금 전까지 허리를 단단히 감싸던 팔은 그녀가 뒤로 밀리지 않도록 그대로 받치고 있었다. 급하게 몰아붙이는 입맞춤은 아니었다. 오히려 느렸다. 평소 서이현답지 않을 만큼 확인하듯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그러나 그 느림 안에는 양보가 없었다. 스텔라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순간도, 호흡이 흐트러지는 순간도 전부 자신이 보고 싶었던 것처럼.

 

스텔라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서이현은 그걸 알아차리고 입술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자신 앞에서는 멀쩡한 척을 잘하는 인간이 이런 때에는 솔직했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정작 입을 한번 맞췄다고 손가락 끝까지 굳어 있는 것이 귀여웠다. 한참 뒤 입술이 떨어졌다.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서이현은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스텔라도 몇 초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숨이 조금 가빴고 뺨은 붉었다. 불꽃의 빛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귀 끝까지 색이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을 끌고 다니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서이현은 엄지로 스텔라의 뺨을 한번 천천히 쓸었다. 조금 더 내려와 입술 끝을 살짝 문질렀다. 그리고 아주 낮게 물었다.

 

“이제 좀 들려?”

 

스텔라가 눈을 떴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서이현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뒤에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수천 개의 금빛이 강 위로 쏟아졌다. 주변 사람들이 동시에 감탄했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높이 들어 그 장면을 찍었다. 누구에게는 아마 그 불꽃이 오늘 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었다.

 

서이현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부터 하늘은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것이 더 좋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낮에 자신이 했던 말이 조금 우스워졌다.

 

진급은 결과고, 달성하면 그다음 목표가 또 온다고 했던 것.

 

그 말 자체는 여전히 틀리지 않았다. 아마 소령이 되어도 그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더 높은 곳을 보고, 더 큰 것을 원하고, 손에 쥔 것보다 아직 없는 것을 먼저 셀 것이다. 그런 성질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다.

 

다만 이제는 하나를 알았다.

그 다음으로 가는 동안에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

 

그 사이에도 좋아하는 것을 먹고, 쓸데없는 가챠에 돈을 쓰고, 햇빛 좋은 카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손을 잡고 모르는 노래를 들으며 걸을 수도 있고,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20분을 더 걸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어느 날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목적지보다 그 길이 더 선명하게 남을 수도 있다는 것. 오늘의 서이현에게는 이미 그랬다.

 

불꽃놀이 자체보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더 많이 기억났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뒤에도 그럴 것 같았다.

 

스텔라가 노란 유카타를 입고 사람 사이를 뽈뽈 걸어가던 뒷모습과, 자신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네던 손, 그리고 방금 입을 맞추기 직전 불꽃이 비치던 눈. 결과보다 과정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평생이 걸린 사람에게, 그날 밤은 어쩌면 처음으로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된 시간이었다. 서이현은 아직도 스텔라의 허리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리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제대로 들어.”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에는 불꽃이 터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하늘 전체가 다시 한번 환하게 밝아졌다.

 

“예쁘다고.”

 

시선은 스텔라에게 그대로 박힌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