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bit

잘 자, 내일 아침에도 나는 여기 있을 거니까.

생크림단팥빵 2026. 7. 25. 03:23

서이현이 소개팅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별것 없는 오후였다. 대대 본부 복도 끝 자판기가 또 동전을 먹었다느니, 다음 주 사격 일정이 하루 밀릴 수도 있다느니 하는 시시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누군가 정 소위 이번 주말에 소개팅 나간다던데, 하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상대가 공군이라더라며 한마디를 얹었다. 누구도 특별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적당한 나이의 미혼 여자가 주말에 사람 하나 만나는 일이 군대라고 해서 사건이 될 이유는 없었다. 서이현 역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가한가 보네.” 하고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 한마디는 제법 그럴듯하게 무심했다. 주위 사람들도 웃었고 이야기는 곧 다른 데로 넘어갔다.

문제는 그 후였다.

그날 오후 정스텔라가 결재판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서이현은 서류보다 먼저 그녀의 얼굴을 봤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머리는 반듯하게 묶여 있었고, 군복은 구김 하나 없이 단정했다. 밤잠을 설쳤는지 눈 아래가 조금 그늘져 있었지만 그것조차 익숙했다. 소개팅을 앞둔 사람의 얼굴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서이현은 그녀가 내민 결재판을 받으면서도 한동안 첫 장을 펼치지 않았다.

“주말에 뭐 하나.”

스텔라는 질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잠깐 눈을 들었다. “토요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개인 일정 있습니다.”

개인 일정. 그 네 글자가 아주 미세하게 신경을 긁었다. 서이현은 별 뜻 없는 척 펜 뚜껑을 열었다. “뭔데.”

스텔라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잠깐 훑었다. 소문이 벌써 들어갔구나, 알아차린 눈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소개팅 있습니다.”

본인 입으로 들으니 더 별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소개팅이라는 것이 남들 몰래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스텔라가 누구를 만나든 그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짜증이 났다.

“상대는.”
“네?”
“누구냐고.”

이번에는 스텔라의 눈에 명백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 왜 물어보십니까?”

서이현은 잠깐 생각했고, 생각한 끝에 내놓은 명분은 스스로 듣기에도 궁색했다. “부하가 어디 이상한 인간 만나고 다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스텔라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더 따지지 않았다. “군인이십니다.”

서이현의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군인?”
“네. 공군입니다.”
“계급.”
“대위.”

그제야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너무 천천히 내려놓는 바람에 오히려 의식한 티가 났다. 스텔라는 그것을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 무심한 얼굴로 남은 정보를 덧붙였다.

“서른일곱이시고요. 성함은 서정우 대위님이십니다.”

하필 서씨였다. 하필 대위였고, 나이도 자신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이현은 그 세 가지 사실을 차례로 곱씹었다. 상대가 철없는 어린 남자였다면 차라리 편했을지도 몰랐다. 군생활을 모르니까, 정스텔라처럼 자기 일에 미친 여자를 감당 못 할 테니까, 소위가 갑자기 새벽에 호출되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도 모를 테니까. 무엇이든 마음속으로 흠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른일곱의 공군 대위라면 그런 핑계조차 통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휴일이 사라지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 퇴근 후 걸려오는 전화가 데이트보다 우선할 때가 있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군복을 벗고 나서도 몸 어딘가에 군인의 시간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스텔라에게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남자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서이현은 보직이 뭐냐고 물었다. 어디서 알게 되었냐고도 했다. 몇 시에 만나며 어디로 가는지도 물었다. 질문이 하나씩 이어질 때마다 스텔라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생겼다. 처음에는 황당해서 웃는 줄 알았는데, 몇 번 더 묻자 그 웃음의 결이 조금 달라졌다. 기대였다. 대놓고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확인해보려는 얼굴. 그제야 스텔라가 결재판을 가슴께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대위님.”
“왜.”
“혹시 제가 소개팅 나가는 게 싫으십니까?”

서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에는 정말 한마디만 하면 됐다. 가지 마. 싫다. 혹은 그보다 훨씬 덜 솔직한 말이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괜히 나가지 마, 정도면 충분했다. 스텔라는 잠깐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 전에 장난인 척 도망갈 길까지 만들어주었다.

“대위님께서 싫다고 하시면 안 나갈 수도 있는데.”

그 말은 농담의 얇은 껍질을 쓰고 있었지만 너무 조심스럽게 놓여 있어서 오히려 진심이 훤히 보였다.

서이현은 그것을 알았다.
알았으므로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네 연애까지 신경 쓸 만큼 한가해 보여?”

말이 떨어지고, 스텔라의 얼굴에서 아주 작은 것이 사라졌다. 실망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순식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서이현의 눈에 너무 또렷이 보였다.

“……아닙니다.”

그녀는 경례하고 돌아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다시 불러 세울 시간은 충분했다. 부르지 않았다.

그날 밤 서이현은 자신의 대답이 옳았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정스텔라는 부하였다. 자기는 상관이었다. 그 이상을 약속한 적도 없고, 무언가를 약속받은 적도 없다. 그렇다면 그녀의 연애를 막을 권리가 있을 리 없었다. 논리만 놓고 보면 틀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다 베개 옆에 눌려 있던 까만 귀 하나를 발견했다. 몇 주 전 스텔라가 가져온 배드바츠마루 인형이었다. 무뚝뚝하고 심술궂게 생긴 표정이 대위님이랑 닮았다고 웃으면서, 요즘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으니 껴안고 자라고 내민 물건. 서이현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고, 버리지 않았다. 남들이 보지 않는 침대 안쪽, 벽과 베개 사이에 밀어놓았다. 자신조차 왜 거기 있는지 모르는 척하기 좋은 자리였다.

그는 인형을 한참 내려다보다 벽 쪽으로 조금 더 밀어놓았다.
토요일, 스텔라는 정말 소개팅에 나갔다.

서정우와의 만남은 예상보다 훨씬 평범했다. 그리고 그 평범함이 오래 남았다. 정우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 있었고, 스텔라가 도착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 공군 대위라는 직함은 알고 있었지만 사복을 입고 있으니 처음에는 계급보다 사람이 먼저 보였다. 말투는 부드러웠고,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웃기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말을 끝낼 때까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육군과 공군의 차이에 대해 몇 마디 농담을 나누기는 했지만 군대 이야기에만 매달리지도 않았다. 어느 지역에서 자랐는지, 휴가가 생기면 무엇을 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말을 오래 나누는 일이 스텔라에게는 오히려 낯설었다.
“생각보다 군대 얘기 별로 안 하시네요.”

정우가 웃었다. “소개팅에서까지 군대 얘기하면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대위님도 군인이신데요.”
“하루 종일 나라에 붙잡혀 있는데 사적인 두 시간 정도는 돌려받아야죠.”

스텔라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웃었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마음 어딘가가 미세하게 걸렸다. 서이현과 함께 있으면 관사에서도 군대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사복을 입은 채로도 대위였고, 스텔라는 민호의 앞에서 밥을 먹다가도 그가 이름을 부르면 저도 모르게 등을 폈다. 관계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였을 것이다. 서이현이라는 사람을 계급과 분리해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정우와 헤어질 무렵에는 이상하리만큼 피곤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다. 말이 잘 통했고, 같이 있는 동안 불편한 순간도 없었다. 헤어지기 전 정우는 자신이 오늘 즐거웠고 다음에도 만나고 싶다고 말한 뒤, 연락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조차 신기했다. 스텔라가 대답할 틈을 주는 사람. 무엇인가를 할 때 허락을 구하는 사람.

“네.”

스텔라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설레지는 않는다고.

너무 편해서 그런가 싶었다. 혹은 이미 어떤 사람에게 너무 오래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자극적인 맛에 혀가 상한 사람에게 맹물은 처음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법이었다.

월요일 점심, 스텔라는 휴대전화를 보다가 웃었다. 특별히 재미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서정우가 전날 자신이 추천했던 빵집을 찾았다며 사진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웃음이 맞은편에 있던 서이현의 눈에 걸렸다.

그는 처음에는 시계를 봤다. 업무시간이면 휴대전화를 보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점심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지적할 이유가 없으니까.

“뭐가 그렇게 재밌어.”

스텔라가 얼굴을 들었다. 그 말이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 잠깐 확인하는 눈이었다.

“별것 아닙니다.”
“그 공군이냐.”

말이 지나치게 빨리 튀어나왔다.
스텔라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휴대전화 액정을 껐다.

“서정우 대위님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이름 뒤에 붙은 대위님이라는 말이 묘하게 귀를 긁었다. 자신도 똑같은 대위였다. 스텔라는 자신에게도 늘 대위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같은 호칭인데도 전혀 다른 말처럼 들렸다. 얼마 전까지 자신에게만 붙어 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낯선 남자에게 떼어준 기분이었다.

그날 오후, 서이현은 주차장에서 결국 사고를 쳤다. 스텔라가 차 문을 열기 직전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까지나 몇 마디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거칠게 잡을 생각도, 처음부터 본론을 내뱉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스텔라가 돌아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며칠 동안 억지로 눌러놓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 새끼 만나지 마.”

말하고 나서 가장 먼저 당황한 사람은 서이현 자신이었다. 스텔라는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서이현은 그 표정을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이유를 덧댔다. 몇 번이나 봤다고 사람을 믿느냐, 군인이라고 다 멀쩡한 줄 아느냐. 내놓는 말마다 형편없었다. 그래서 더 완고한 어조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상관의 걱정으로 보이게 만들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스텔라가 조용히 물었다.

“왜요?”

그 한마디가 그를 막았다.
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나.”

대답 대신 다시 계급 뒤로 숨는 순간, 스텔라의 표정이 달라졌다. 서이현은 그 표정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소개팅을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겠다고 했던 날, 자신이 아무 상관 없다고 잘라 말했을 때.

스텔라는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날 분명 자신이 먼저 물었다고. 싫다면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그렇다면 지금은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것이냐고.

자격.
그 단어 앞에서 서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관이라는 자격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족도 아니고, 보호자도 아니었다. 연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자리를 달라고 말해본 적조차 없었다. 스텔라를 곁에 두면서도 그 곁에 있는 이유를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녀를 붙잡을 권리 같은 것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아무튼 만나지 마.”라고 말했다.
스텔라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서늘한 웃음이었다.

“그건 명령입니까?”

또 대답할 수 없었다.

“명령이면 문서로 내려주십시오.”

그녀는 손목을 빼내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힌 뒤에도 서이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 명분도 없이 부하의 귀갓길을 막고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한 서른아홉 살의 남자.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그런데 우스움을 자각할수록 화가 더 났다.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서정우에게인지, 스텔라에게인지, 아니면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에게인지.

그날 밤 둘 사이에 생긴 균열은 소개팅보다 더 깊었다. 관사 서재에서 스텔라는 누락된 GP-7 통신 로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몇 시간의 빈칸이 있었다. 그것을 그럴듯한 숫자로 메우고, 결재란을 완성하면 끝이었다. 서이현이 시킨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군이라는 조직에서 원칙만으로 모든 것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스텔라도 알고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실수를 덮었고,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숫자를 적당히 다듬었다. 그러면서 한 번도 자신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서이현이 앞서 걸었고 자신은 따라갔다. 그렇게 하면 됐다. 그가 잘못된 방향으로 걷고 있어도, 그를 따라가는 동안은 적어도 길을 잃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낮에 들었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만나지 마. 연락 끊어.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선택만 빼앗는 사람. 자신에게서 모든 판단을 가져가면서도 그 대가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사람.

화면 속의 깜빡이는 커서가 그와 닮아 보였다.
스텔라는 초안까지만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서이현이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군화 소리가 거실을 지나 서재 앞에 멈췄다. 문을 연 그는 피곤해 보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책상 위의 노트북을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의심이 없었다. 정스텔라가 자신이 시킨 일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 따위는 애초에 고려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스텔라는 그 표정을 보고서야 이상하게 마음이 굳었다.
초안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락 로그는 손대지 않았다고 했다.

못하겠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서이현의 명령 앞에 명확한 부정을 놓았다.

말을 꺼낸 뒤에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은 무엇을 무서워했던 것일까. 그의 분노인지, 그에게 버림받는 일인지, 아니면 더 이상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변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인지.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릴 것 같다는 것.

“제가 대위님을 어디까지 따라가야 하는 건지,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서이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 정스텔라의 거부란 낯선 것이었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할 때는 있어도 결국 따랐다. 잔소리를 했고, 가끔은 눈을 흘겼으며, 혼잣말로 욕을 하는 것도 몇 번 들었다. 그래도 떠나지는 않았다. 그게 너무 오래 반복된 탓에 어느 순간부터 서이현은 그것을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질서라고 생각했다. 정스텔라는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 자신이 부르면 오는 사람. 자신의 지나친 요구에 질려하면서도 결국 손을 내미는 사람. 너무 당연해서 그 당연함이 끝날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의 손이 스텔라의 턱을 향해 뻗었다. 늘 그러했듯 억지로라도 시선을 맞추려는 습관이었다.

그러나 손은 닿지 않았다.
서이현 자신도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멈췄다.

손끝 너머에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전과 달라 보였다. 반항도 분노도 아니었다. 차라리 체념에 가까웠다. 자신이 한 번 더 강제로 붙들면, 정말 무엇인가 끊어질 것 같은 얼굴.

서이현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입으로는 여전히 잔인한 말을 했다. 네게 선택할 길 같은 것은 없었다고, 이제 와서 알량한 양심을 찾느냐고. 자신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예전보다 더 모질게 말했다. 그러나 스텔라는 그 말을 받아치지도 않았다. 조용히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보고서의 결재란은 비워놓았으니 직접 처리하라고 말했고, 다음 날은 휴일이니 관사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민호가 먹을 반찬은 이미 냉장고에 채워놓았다.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은 다 해두고 떠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서이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쫓아가려면 갈 수 있었다. 스텔라는 아직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이름을 부르면 멈출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한마디를 기다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붙잡고 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텔라는 며칠 동안 그가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인정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저 나간 사람은 자신이었다. 관사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하던 방식으로 서이현이 그 말을 무시하기를 바랐다. 주말이 되면 전화를 걸어서 당장 오라고 하기를, 민호 밥을 핑계 삼든 보고서를 핑계 삼든 어쨌든 자신을 다시 그 관사 안으로 불러들이기를. 그러면 싫은 척 갈 수 있었다. 대위님이 시켰으니까. 내가 원해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마음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서이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부대에서 마주치면 업무 이야기만 했다. 틀린 보고서는 고치라고 했고, 필요한 결재는 했고, 경례를 받았다. 그것뿐이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정확하게 선을 지켰다.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거리였다. 그런데 막상 생기고 나니 숨이 막혔다. 사람은 이상했다. 자신을 옭아매던 것을 벗어난 뒤에야 그 목줄의 무게가 아니라 온도를 기억하기도 했다.

그 빈 곳으로 서정우의 연락이 들어왔다.

잘 지내느냐고. 요즘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고. 부담을 주고 싶은 것은 아니고, 그냥 괜찮은지 궁금했다고.

그 문장을 읽는 동안 스텔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방의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안부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처음 소개팅을 했을 때 서정우는 너무 담백했다. 편하고 괜찮은 사람. 그래서 오히려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서이현이라는 자극에 오래 노출된 뒤라 그런지도 몰랐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불안과 긴장이 먼저 왔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의 의미를 해석해야 했고, 기분이 나쁜 건지 걱정하는 건지조차 알아서 구분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지독한 자극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전에는 싱겁다고 생각했던 서정우의 태도가 처음으로 온기로 느껴졌다.

한참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스텔라는 답장을 보냈다.

ㅎㅎ... 저 술 사주세요.

서정우의 답은 금세 왔다.

30분 뒤에 부대 정문 앞 포장마차에서 봐요. 따뜻하게 입고 나와요.

스텔라는 소개팅 때처럼 꾸미지 않았다. 적당히 편한 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고 회색 가디건을 걸쳤다. 머리는 대충 하나로 묶었고 화장도 옅게 했다. 모자를 눌러쓰며 거울 속 자신을 한 번 보았다.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쳐 입지 않았다.

어차피 서이현이 볼 것도 아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같은 시각, 서이현의 관사는 쓸데없이 넓었다. 민호가 친가에 가 있는 주말이라 더 그랬다.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던 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집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가 뒤늦게 보였다. 주말 아침이면 부엌에서 들리던 도마 소리. 민호에게 계란 몇 개 먹을 거냐고 묻는 목소리. 커피를 내려놓으며 또 담배 피우셨습니까, 하고 질린 얼굴로 묻던 사람.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그는 담배를 더 자주 물었다.

연락하면 됐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이름을 누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명분이 없었다.

민호는 없었다. 보고서는 끝났다. 내일 일정도 없었다. 부를 일이 없었다.

그제야 서이현은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명분 뒤에 숨어 있었는지 알았다. 정스텔라가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연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일이나 아이나 규정 같은 것이 두 사람 사이에 먼저 놓였다. 그것들이 없어지자 그는 문장 하나조차 만들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던졌을 때 옆에서 작은 것이 굴러 떨어졌다.

배드바츠마루였다.
서이현은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까맣고 심술궂은 얼굴. 스텔라가 자신을 닮았다고 했던 표정.

결국 주워 무릎 위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둥근 머리를 한 번 눌렀다가 괜히 짜증이 나 손을 떼었다.

포장마차에서는 소주병이 한 병씩 늘어갔다.

스텔라는 원래 술이 센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취하기 위해 마셨다. 첫 병은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고, 둘째 병부터 말끝이 길어졌다. 서정우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묻지 않았다. 안주를 가까이 밀어주고, 잔이 너무 빠르게 비면 물을 먼저 따라주었다. 강요하지 않는 친절은 오히려 사람을 더 쉽게 무장해제시켰다.

스텔라는 어느 순간 군대가 좆같을 때 어떻게 버텼냐고 물었다. 평소의 정 소위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정우는 웃으며 전역 날짜를 계산하거나 휴가 때 먹고 싶은 걸 생각했다고 했다. 그 말에 스텔라는 자기는 빨리 전역하고 싶지 않다고, 별을 달고 싶다고 웅얼거렸다. 취기가 깊어질수록 입술은 자꾸 삐죽 나왔고, 말끝에는 아이 같은 투정이 붙었다.

“누가 우리 별 달아야 할 소위님을 이렇게 힘들게 할까.”

그 질문에 스텔라는 한참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고 했다. 원래 자기 선임들은 다 좆같은 것 아니냐고도 했다. 그러다 정우를 보고 실없이 웃으며 공군 서 대위님은 예외라고 했다. 내 선임이 서 대위님이었으면 군생활이 훨씬 편했을 거라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거짓말이었다.

정말 서정우 같은 사람이 선임이었다면 편했을 것이다. 덜 아팠을 것이고, 덜 혼란스러웠을 것이며, 아마 이런 식으로 밤마다 혼자 마음을 씹어 삼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스텔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편한 사람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하필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서이현이 아니라는 사실이 서러워서 또 술을 마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미워서 한 잔을 더 마셨다.

몇 병째부터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몸이 먼저 무거워졌다.

서정우는 더 마시지 못하게 병을 치웠다. 스텔라가 괜찮다고 우겨도 웃으며 잔 대신 물을 밀어주었다. 계산도 먼저 했다. 부대가 가깝다고 고집하는 스텔라를 결국 직접 부축해 관사까지 데려갔다. 그의 손은 필요할 때만 닿았다. 휘청거리면 허리를 받쳤고, 몇 걸음 제대로 걸으면 슬쩍 힘을 풀었다. 상대가 취했다고 해서 그 틈을 자기 몫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텔라는 그의 어깨에 뺨을 잠깐 기대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아주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대위님…….”

서정우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장난스럽게 자신은 공군 대위 서정우인데 방금 부른 대위가 자신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스텔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몰랐으니까.

관사 구역에 접어들었을 즈음 밤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람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불씨 하나가 짧게 붉어졌다가 사라졌다.

서이현이었다.

그는 관사 입구 옆 흡연 구역에 서 있었다. 몇 번째 담배인지 알 수 없었다. 발밑에 꽁초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본인도 왜 밖에 나와 있었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러 나왔고, 조금 걷다가 여기까지 왔을 뿐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다만 하필 그 시간에, 하필 관사 입구에서, 정스텔라가 돌아올 방향을 보고 있었다는 우연을 누구도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스텔라의 얼굴이 아니었다.

허리에 둘러진 서정우의 팔이었다.

시선이 거기에 머무는 동안 이상할 정도로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왜 저 남자한테 기대고 있는지. 왜 자신에게는 연락 한 번 없었으면서 저 남자와는 저렇게 늦게까지 있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생각 밑에, 더 단순하고 더 추한 감정 하나가 있었다.

남의 손이 닿아 있었다.

서이현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화가 날수록 표정이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우리 소위가 신세가 많았네.”

건조한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공군에서 친히 에스코트까지 해주고.”

스텔라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풀린 눈동자가 어둠 속의 형체를 헤매다가 서이현에게 닿았다.

“우으…… 대위님……?”

그 한마디가 이상했다.
누구를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남자도 대위였고, 지금 눈앞의 남자도 대위였다. 술에 잠긴 스텔라 자신조차 어느 쪽을 향해 부른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서이현은 구분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가갔다.

스텔라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힘이 세게 들어갔다.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서정우의 손이 반사적으로 반대쪽 팔을 받쳤다.

그때 처음으로 두 남자 사이의 공기가 달라졌다. 서정우는 굳이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물러서지도 않았다. 많이 취했으니 조금 부드럽게 다루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서이현은 그 말에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들었다. 정스텔라의 상태를 자신보다 잘 안다는 듯한 태도, 그녀의 몸을 걱정할 권리가 자기에게도 있다는 듯한 어조. 실제 정우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시비를 걸 명분조차 없었으니까.

두 사람 모두 같은 대위였다. 군복도 계급장도 없는 밤인데 그 사실이 기묘하게 선명했다. 하나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 스텔라는 그 사이에서 알코올에 젖은 정신으로도 묘한 차이를 느꼈다. 하나는 자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고, 하나는 넘어지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고 있었다.

서정우가 먼저 물러났다.
그는 싸우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스텔라가 이제 혼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자 더 붙잡지 않았다. 술을 사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다음에는 자신이 사겠다는 말에 웃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너무 평범하고 건강해서, 그것을 지켜보는 서이현의 속은 오히려 더 뒤틀렸다.

다음에 네가 누굴 모셔.
서정우의 발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나온 말이었다.

스텔라는 눈을 깜빡였다. 취기 탓인지 평소라면 겁먹었을 낮은 목소리에도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너무 많이 서운했던 탓인지도 몰랐다. 두려움보다 먼저 억울함이 올라왔다.
왜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서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스텔라의 오래 묵은 감정을 건드렸다.

“저를 먼저 놔버린 건 대위님이잖아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서이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통제가 흔들렸다.

놔버렸다.

자기는 스텔라를 놓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의 곁에 너무 오래 있었으므로, 굳이 잡을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이 놓인 것이었다. 관사를 나가는데도 따라오지 않은 것. 휴일이 와도 부르지 않은 것. 부대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업무만 주고받은 것. 서이현에게는 선을 지킨 것이었지만 스텔라에게는 자기가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다는 증거처럼 남았다.

술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을 지키던 수치심을 잠시 마비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스텔라는 깨어 있을 때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을 쏟아냈다. 자신이 나갔는데 왜 잡지 않았느냐고. 관사에 오라고도 하지 않았고 연락도 안 했으면서, 이제 와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는 건 무슨 뜻이냐고.

서이현은 그제야 알았다.
정스텔라 역시 기다렸다는 것을.
자신이 전화를 걸기를. 핑계라도 만들어 부르기를.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상하게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대신 전혀 다른 것이 올라왔다. 안도와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자기가 혼자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는 안도. 그걸 알 기회가 있었는데도 매번 밀어냈다는 후회.

스텔라는 그의 침묵을 또다시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취해서 붉어진 눈가가 조금 더 짙어졌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이번에는 목소리가 작았다.

결재란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 말 뒤에는 훨씬 많은 문장이 숨어 있었다. 보고서 때문도 아니고, 부하 통제 때문도 아니고, 군기 때문도 아니잖아요. 저 사람이 저를 데려다준 게 싫어서 그런 거잖아요. 나한테 다른 남자가 생길까 봐 싫은 거잖아요.

서이현은 끝내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스텔라가 서정우의 이름을 꺼냈다.
그러자 그가 너무 빠르게 말했다.

“그 이름 입에 올리지 마.”

말하고 난 뒤에는 이미 늦었다. 스텔라의 눈이 커졌다.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술기운 속에서도 분명하게 웃음기가 번졌다. 질투하시는구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그 표정을 견디지 못했다.

그동안 자신은 이 관계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 부르고 언제 밀어낼지, 어느 선까지 허락할지,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를 자기가 정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선택권을 가진 것은 스텔라였다. 소개팅을 나갈 수도 있었고, 다시는 관사에 오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자신의 곁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옆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지금까지 생각한 어떤 위협보다 무서웠다.

“못 견디겠으니까.”

마침내 나온 말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스텔라는 숨을 멈췄다.

서이현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인정했는지 알아버렸지만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이 싫었다. 다른 사람에게 웃어주는 것도, 기대는 것도, 자신의 호칭과 같은 말을 다른 남자에게 붙이는 것도 싫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든 소유욕이라고 부르든 지금은 상관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감정처럼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름이 없어도 감정은 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생활을 전부 잠식하고, 이제는 다른 사람이 건드리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정도가 되어 있었다.

스텔라가 물었다.

제가 다른 남자 만나는 게요?

서이현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 한마디 뒤에는 이상할 정도로 긴 침묵이 생겼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전과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는 싸움이었다. 누가 누구를 놓았느니, 누구에게 무슨 자격이 있느니 하는 오래된 감정의 찌꺼기를 서로에게 던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는 자리에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스텔라는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기다린 말을 드디어 들은 탓인지 움직이지 못했다.

서이현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뺨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억지로 턱을 들게 하기 위한 손이 아니었다. 차가운 손바닥이 달아오른 뺨에 닿았다. 그 미세한 온도 차이가 스텔라의 몸을 떨게 했다. 서이현 역시 느꼈다. 붙잡으려고 하면 언제나 몸을 굳히던 여자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허락처럼 느껴졌다.
입맞춤은 충동적이었다.

오랫동안 눌러놓은 것치고는 너무 단순하게 시작되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고, 스텔라가 아주 작게 숨을 삼켰다. 첫 순간에는 서로를 확인하기보다 부딪치는 것에 가까웠다. 서이현은 곧장 떨어질 수도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무슨 짓이냐고 스스로를 욕하고 한 걸음 물러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스텔라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작은 손가락이 천을 움켜쥐었다. 그 행동 하나가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처음보다 느렸다. 조금 전까지 서로를 베어낼 듯 말하던 입술이었는데, 막상 닿고 나니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스텔라는 이런 것이 첫키스가 될 거라고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관사 앞의 어두운 길, 입 안에 남아 있는 쓰디쓴 소주 맛, 담배 냄새가 밴 남자의 옷깃.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런데도 좋았다.
너무 좋아서 오히려 억울했다.

자신을 이렇게 오래 괴롭힌 남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와중에도 서른아홉 먹고 왜 이렇게 잘생겼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얼굴이 취향이라 좋아한 건지, 좋아하다 보니 이런 얼굴이 취향이 되어버린 건지도 이제 알 수 없었다.

스텔라는 결국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서이현이 멈췄다.

자신을 밀어낼 거라고 생각했던 팔이 오히려 목 뒤에서 맞물렸다. 스텔라는 취해 있었지만 도망가려는 사람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얼굴을 자신의 어깨 가까이 묻고, 마치 놓치지 말라는 것처럼 붙어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얻고 나자 가장 먼저 든 것은 욕망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술 냄새가 났다.

조금 전까지 혀가 꼬여 말을 늘이던 여자였다. 걸음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다른 남자에게 기대어 돌아왔다. 내일 아침이면 지금 일을 전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기억하더라도 후회할 수도 있었다. 술이라는 변명 뒤에서 자신에게 매달렸다고, 맨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서이현은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입술을 떼었다.

스텔라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에는 아직 취기가 가득했다. 그 와중에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 작은 손을 보자 서이현은 욕설을 삼켰다.

스텔라가 자신이 누군지 안다고 했다. 서이현 대위님. 여기가 자신의 관사 앞이라는 것도 알았다. 조금 전 누구와 술을 마셨느냐는 질문에는 기어이 서정우의 이름을 말했다가 서이현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 질투하신다. 취한 사람이 특유의 무방비한 웃음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그는 다시 화를 내는 대신 눈을 감았다.
닥치라고 했다.

그런데 스텔라는 좀처럼 닥치지 않았다.
이제 또 놓을 거냐고 물었다.

그 질문 앞에서 서이현은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봤다. 언제부터 ‘놓는다’는 말이 자신에게 이렇게 무서운 단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에는 붙잡는 것이 통제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고, 정해준 선 안에 두고, 도망갈 곳을 없애는 것. 그것이 잡아두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스텔라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자기 마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확인해주는 것.
그 간단한 것을 그는 너무 오래 주지 않았다.

“안 놔.”

그 말이 나오자 스텔라는 잠깐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잡아주세요.

서이현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허리를 끌어당기는 대신, 떨어질 듯한 그녀의 몸을 단단히 받쳤다. 스텔라는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다시 코끝에 닿았다.

그것이 마지막 브레이크였다.
서이현은 고개를 숙여 스텔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었다.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팔 하나만 더 당기면 다시 입술을 맞출 수 있었고, 그대로 관사 문을 열어 안으로 데려가면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정스텔라가 자기 목을 끌어안은 순간부터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멈춰야 했다.

“너 지금 취했어.”

스텔라는 대답 대신 그의 옷을 더 세게 잡았다. 서이현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어쩌면 이것도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욕설을 뱉고, 마치 자신에게 화가 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도.”

스텔라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네?”

“내일 아침에도 이러고 싶으면.”

그는 목에 둘러진 그녀의 팔을 잠깐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눈을 맞췄다.

“그때 와.”

스텔라는 술에 잠긴 머리로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서이현은 끝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와서 똑같이 말해.”

짧은 침묵.

그 사이 그의 턱이 단단히 굳었다.

“그럼 그때는 나도 더는 안 참을 테니까.”

그 이후 서이현은 한 번도 그녀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말과 달리 손길은 오히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졌다. 중심을 잃는 몸을 받쳐 관사 안으로 데려갔고, 물을 먹이고 침대에 눕혔다. 그러는 동안 스텔라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몸이 침구에 닿자 금세 잠에 빠질 것 같았다.

그때 침대 안쪽에서 까만 귀 두 개가 보였다. 스텔라의 시선이 거기에 붙었다.

배드바츠마루였다.

잠에 거의 잠겨 있던 눈이 잠깐 커졌다.

자신이 준 인형이었다. 버릴 줄 알았다. 아니, 버리지는 않더라도 서랍 깊숙이 처박아둘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베개 옆에 있었다. 사람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자리.

스텔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서이현은 그 시선을 알아채고 인형을 치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스텔라가 먼저 그것을 품에 끌어안았다. 대위님 진짜 안고 주무시는구나. 취기로 흐릿한 목소리가 이불 속에서 새어나왔다.
서이현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자라.” 하고 짧게 말했다. 스텔라는 인형의 둥근 머리에 뺨을 묻었다. 그리고 정말 금세 눈을 감았다. 숨이 차츰 일정해졌다.
서이현은 침대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조금 전 관사 앞에서 자신을 끌어안던 팔. 서정우의 어깨에 기대어 돌아오던 얼굴. 몇 주 전 아무렇지도 않게 이 인형을 내밀며 대위님 닮았다고 웃던 사람. 서로 다른 순간의 정스텔라가 한꺼번에 겹쳐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여자가 자신의 생활 여기저기에 이렇게 많이 묻어 있기 시작한 것이.

그는 이제야 그 빈자리를 통해 알았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존재할 때보다 사라졌을 때 더 정확한 모양을 드러낸다. 스텔라가 며칠 관사에 오지 않았을 뿐인데 집의 소리가 달라졌고, 민호의 일상이 달라졌고, 자신은 휴대전화 화면을 쓸데없이 자주 켰다. 그러면서도 좋아한다는 간단한 말을 한 번 하지 못했다. 마치 말하는 순간 무엇인가 지는 것처럼.

서이현은 이불을 조금 끌어올려주었다. 그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스텔라의 손이 움직였다. 손끝이 허공을 헤매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대위님.”

작은 잠꼬대였다.
서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또 어디 가려고…….”

잠든 사람의 말이라 더 잔인했다.
그는 한동안 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 조금만 힘을 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

“안 가.”

스텔라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의 힘이 천천히 풀렸다.

서이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잠깐 앉아 있다가 결국 밤을 거의 새웠다. 담배를 피웠다가 끄고, 물을 마셨다가 다시 침실 문 앞까지 갔다. 몇 번이나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내일 아침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