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그러지 마. 네가 잘못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나는 아직 네가 내게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네가 없어지는 것부터 먼저 상상하게 만들지는 마.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야. 살아 돌아와줘서 다행이라고.
훈련 중 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받은 순간부터 서이현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위험 구역 안에 인원이 남아 있다는 것, 그 인원을 빼내기 위해 정스텔라 소위가 상부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진입했다는 것.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온 보고는 그것뿐이었다. 현장에서는 계속해서 짧은 교신이 오갔다. 인원 확인, 장비 통제, 진입 금지선 재설정. 평소의 서이현이라면 그 모든 정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정리했을 것이다. 사고의 원인을 추리고, 책임 범위를 나누고, 다음 지시를 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귀에는 분명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오는데, 머릿속에는 단 한 문장만 남았다.
정스텔라가 아직 안 나왔다.
그 사실이 다른 모든 판단을 밀어냈다.
서이현은 팔짱을 끼고 훈련장 한편에 서 있었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미간이 조금 좁아져 있을 뿐이었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누군가 상황을 보고하면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필요한 지시도 정확하게 내렸다. 다만 팔뚝을 움켜쥔 손가락이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군복 천 아래 피부에 손톱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초조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독 행동을 한 부하 때문에 현장이 더 꼬일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소위 하나가 지휘 체계를 무시하면 그 뒤에 붙는 책임이 몇 개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사고가 나면 누가 조사받고 어떤 보고서를 써야 하는지, 그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것뿐이라고. 그러나 무전이 잠시 끊길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몇 초면 충분했다. 그 짧은 침묵 사이로 별의별 장면이 다 떠올랐다. 무너진 구조물 아래에 깔린 스텔라, 제 발로 나오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나오는 스텔라, 피투성이가 된 군복. 마지막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서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미친 년.
누가 너더러 들어가랬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욕을 속으로 몇 번이나 씹었다. 화가 나서였다. 그래야 했다. 지금 가슴팍을 안에서부터 긁어대는 이 감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상관이 부하 하나 때문에 이런 식으로 흔들리는 건 우스웠고, 무엇보다 스텔라 하나 때문에 제 판단이 흐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나옵니다.”
서이현의 고개가 거의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먼지 사이에서 사람이 하나 걸어 나왔다. 처음에는 군복만 보였다. 그다음에 모자, 흙투성이 얼굴, 팔에 난 피, 절뚝거리는 다리. 그리고 그제야 얼굴이 선명해졌다.
정스텔라였다.
제 발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서이현은 오히려 숨을 쉬는 법을 잠깐 잊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것이 한꺼번에 풀리며 속이 비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안도했다는 자각조차 하기 전에 다리에 아주 미세하게 힘이 빠졌다. 그 사실이 수치스러워 그는 곧장 무릎에 힘을 줬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안도감은 분노로 뒤집혔다. 그게 서이현에게는 훨씬 익숙한 감정이었다.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저 꼴이 되도록 제멋대로 움직였다는 생각을 먼저 붙잡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저 여자 앞까지 성큼성큼 가서 살아 있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정소위.”
낮고 건조한 목소리에 주변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스텔라가 그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 이리 와.”
스텔라가 걸어왔다. 평소와 같은 보폭을 유지하려는지 자세는 꼿꼿했지만 한쪽 무릎이 디딜 때마다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서이현은 그걸 알아봤다. 팔에 난 길고 얕은 상처도, 군복 무릎 부분에 번진 핏자국도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시선이 그곳에 박혔지만 그는 곧 얼굴을 들었다.
쳐다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더 쳐다볼 수가 없었다.
주변에 아직 장병들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장비를 옮기면서 이쪽을 곁눈질했고, 누군가는 대놓고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서이현은 그 시선들을 느꼈다. 상관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기서 스텔라의 독단 행동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됐다. 그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그가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이었다.
“상부 지시 없이 독단으로 위험 구역 진입한 거, 본인이 설명할 수 있어?”
질문은 차가웠다. 스텔라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현장 지휘자 판단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서이현의 턱이 굳었다.
현장 지휘자 판단.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현장에서는 몇 초의 판단이 사람을 살릴 때도 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서이현이 잘 알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다면 손쉽게 짓밟아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사람을 구했고, 스텔라는 그 과정에서 다쳤다. 그렇다면 자기는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가.
명령 체계에?
독단 행동에?
아니면 저 여자가 자기 몸을 너무 쉽게 던졌다는 것에?
“현장 지휘자 판단.”
그가 느릿하게 되뇌었다.
입가에 비웃음이 얹혔다. 자기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장 익숙한 표정을 고른 것이었다.
“그 현장 지휘자가 소위 너야? 중위야? 대위야?”
검지가 스텔라의 왼쪽 어깨를 툭 찔렀다. 계급장이 달린 자리였다. 손가락 끝에 닿은 군복이 땀과 먼지로 축축했다. 그 감촉 때문에 이상하게 속이 더 뒤집혔다.
“소위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란 걸 육사에서 안 배웠어? 아니면 수석 졸업한 머리로도 그 정도 계산이 안 됐나.”
말을 뱉은 직후, 서이현은 알고 있었다. 이건 지나쳤다. 지적해야 할 것은 행동이었지 스텔라의 자존심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 굳이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한번 독을 뱉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말을 멈추면 전혀 다른 것들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대체 왜 들어갔냐고.
네가 안 나오면 어떡하려고 했냐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고.
차라리 모질게 구는 게 나았다.
“네 판단 하나 때문에 다른 인원까지 연쇄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었어. 그거 알아?”
“…시정하겠습니다.”
너무 반듯한 대답이었다. 서이현의 속에서 무언가가 또 뒤틀렸다. 그는 스텔라가 대들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제가 사람을 살렸지 않습니까, 그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치켜뜨고 따져주면 자기도 그 논리에 대고 반박할 수 있었다. 싸움의 모양이라도 제대로 갖춰졌을 것이다.
그런데 스텔라는 고개를 숙였다.
“시정하겠습니다.”
그 말 하나로 끝냈다.
마치 그의 말이 전부 옳다는 것처럼.
마치 서이현에게 더 설명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시정.”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 말 참 쉽게도 하네.”
스텔라의 팔에 난 상처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피가 굳어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위험 구역에 혼자 쳐들어가서 팔이 저 꼴이 나도록 긁혀 와 놓고, 시정하겠습니다?”
자기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서이현은 즉시 이를 물었다. 더 차갑게 굴었다.
“영웅이라도 된 줄 알아? 소위 하나가 몸 던져서 뭘 바꾸겠다고.”
그다음 말은 거의 자동으로 나왔다.
“네가 거기서 죽었으면 그 현장에 있던 애들 전원 책임 소재 조사 들어가는 거야. 그건 생각 안 해봤어?”
죽었으면.
자기가 뱉은 단어가 너무 선명해서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는 불과 몇 분 전, 그것을 실제로 상상하고 있었다.
들것 위에 누워 있는 스텔라.
움직이지 않는 스텔라.
다시는 자기 앞에서 넵, 하고 대답하지 않는 스텔라.
그 이미지를 억지로 밀어내듯 손이 올라갔다. 스텔라의 턱을 잡았다. 세게 잡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손끝에 힘이 실렸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다. 눈앞에 얼굴이 있었다. 살아 있는 얼굴. 서이현은 그제야 자기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급히 힘을 더 주어 떨림을 감췄다.
“다음에 이런 짓 하면 내가 직접 군기교육대 보내줄 테니까 각오해.”
“…시정하겠습니다.”
또 그 말.
서이현은 턱을 잡은 손을 놓았다.
스텔라가 짧게 경례하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잠깐.”
목소리가 생각보다 급하게 나갔다. 스텔라가 돌아봤다. 서이현은 자기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되돌릴 수도 없어 잠시 굳었다. 왜 불렀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준비한 말이 없었다. 가라고 해놓고 다시 세운 이유를 자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장 그럴듯한 핑계를 골랐다.
“팔 내밀어.”
“…넵.”
“보고 안 올린 거 내가 직접 확인해야 되니까. 상처 상태 브리핑해.”
누가 들어도 궁색했다. 의무기록을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고, 그것을 모를 서이현이 아니었다. 스텔라는 아무 말 없이 팔을 내밀었다. 서이현은 그 팔을 잡았다. 처음에는 성질대로 거칠게 움켜쥐었지만, 손가락이 상처에 닿기 직전 자신도 모르게 방향을 틀었다. 피가 난 곳을 피해 멀쩡한 피부만 잡았다. 손바닥 아래로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도였다. 그 단순한 사실이 가슴 안쪽을 이상하게 후벼팠다. 그는 팔을 이리저리 돌려 상처를 살폈다. 흙과 작은 자갈 조각이 박혀 있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깊었다.
“이게 가벼운 상처야?”
목소리를 낮췄지만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스텔라의 무릎으로 눈이 갔다. 군복이 찢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피부가 벗겨진 것이 보였다. 서이현의 턱에서 딱 소리가 날 만큼 힘이 들어갔다.
“…보고서에 경상이라고 올릴 생각이었으면 집어쳐.”
뒤의 의무병을 불렀다.
“소독하고 처치해. 제대로.”
그는 팔을 놓았다. 손에서 스텔라의 체온이 사라졌다. 그게 이상하게 싫어서 곧장 등을 돌렸다. 뒤쪽에서 소독약 병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즈가 바스락거렸고, 잠시 뒤 스텔라의 숨이 짧게 끊겼다. 아픈 모양이었다. 서이현의 손이 뒷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나온 것은 또 다른 문장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것도 보고의 일부야.”
보고.
끝까지 보고였다.
걱정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가장 편리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결국 몸을 돌렸다. 의무병이 스텔라의 팔을 잡고 상처를 닦고 있었다. 별것 아닌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슬렸다. 서이현은 몇 초 동안 그 손만 바라보다가 말했다.
“손 치워.”
의무병이 눈을 들었다.
“예?”
“내가 한다고.”
짧은 정적.
“꺼져.“
의무병이 눈치를 보다가 황급히 물러났다. 스텔라도 조금 의아한 얼굴이었다. 서이현은 그 표정을 못 본 척하고 핀셋을 집었다. 상처에 박힌 작은 이물질을 하나씩 떼어냈다. 손은 아까와 달리 이상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입으로는 그렇게 모질게 굴어놓고, 손끝으로는 조금이라도 아프게 할까 봐 힘을 빼고 있었다. 스스로도 우스웠다. 그래서 더 고개를 숙였다. 그때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대위님은 제가 그렇게 못미더우십니까.”
핀셋이 멈췄다. 서이현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뭐?”
스텔라가 다시 물었다.
“제가 그렇게 못미더우십니까.”
그 말은 예상 밖으로 깊게 들어왔다.
못미덥다.
서이현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스텔라는 지나치게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알아서 잘했고, 맡기면 어떻게든 해냈고, 때로는 그 자신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서 늘 신경이 쓰였다. 잘할 거라는 걸 아니까 눈을 떼도 될 법한데,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그런데 자기가 오늘 한 말만 놓고 보면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 있었다. 스텔라를 머리 나쁜 소위 취급했고, 판단을 비웃었고, 사람들 앞에서 계급장을 찔렀다. 서이현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처음으로 조금 선명하게 보았다. 그런데 인정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핀셋을 탁 내려놓았다.
“지금 나한테 말대꾸야?”
가장 익숙한 곳으로 다시 숨었다. 스텔라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게 보이는데도 멈추지 못했다.
“못미더운 게 아니라 네가 멍청한 짓을 한 거야. 명령 씹고 혼자 돌격하는 게 잘하는 짓이냐고.”
거즈를 들어 상처에 댔다. 손에는 힘을 빼려고 했는데, 감정이 먼저 들어갔다. 스텔라의 팔이 움찔했다. 그 순간 바로 후회했다. 그래도 손을 떼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 구하겠다고? 그래서 네가 거기 누워 있었으면?”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게 구한 거야?”
마지막 문장의 끝이 떨렸다. 이번에는 감추지 못했다. 서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스텔라도 말이 없었다. 그 사이에 아주 짧은 정적이 떨어졌다. 스텔라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서이현은 그 눈을 오래 마주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떨어졌다. 서이현의 표정이 아주 잠깐 일그러졌다. 또 죄송합니다.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사실 무엇을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면서, 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사과만 하는 게 이렇게 속을 긁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면 다야?”
거즈를 내려놓았다.
“그 입으로 죄송하다는 말밖에 못 해?”
한 걸음 가까워졌다.
“후회도 없고 반성도 없으면서 입만 죄송하다고? 그게 나한테 하는 말이야, 아니면 그냥 이 상황 넘기려고 뱉는 말이야.”
스텔라가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무서웠습니다.”
서이현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제 판단에는 반드시 그래야 했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상부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행한 것은 제 잘못 맞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 말에 가슴 어딘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자기는 그렇게 무서웠는데.
저 여자는 무서웠으면서도 다시 같은 상황이 오면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또 이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한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전만 듣고 서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이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회를 안 해.”
낮게 되뇌었다.
“그래서? 네가 안 후회하니까 다 용서받을 일이야? 소위가 영웅심에 취해서 명령 체계 씹어먹은 게?”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숨이 답답했다.
그리고 결국, 끝까지 삼키고 있어야 했던 것이 튀어나왔다.
“네가 거기서 잘못됐으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 생각은 해봤냐.”
말이 끝난 순간 서이현이 굳었다. 스텔라도 아무 말이 없었다. 훈련장 저편에서 장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이현은 자기 심장이 세게 뛰는 걸 느꼈다.
방금 말은 이상했다.
관리 책임이라고 하기엔 너무 개인적이었고, 상관이 부하에게 던질 말치고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급하게 덧붙였다.
“…내 부하가 잘못되면 내 관리 책임이니까 하는 말이야.”
목소리가 한 톤 딱딱해졌다.
“딴 생각 하지 마.”
누가 봐도 늦은 변명이었다.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이 서이현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왜, 할 말 없어?”
“…없습니다.”
“없어?”
헛웃음이 났다.
“아까는 후회 안 한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잘도 지껄이더니 이제 와서 할 말이 없어?”
스텔라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소위 주제에 왜 그러냐고 뭐라 하실 거고, 죄송하다 하기엔 말이 쉽게 나온다며 뭐라 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서이현이 아무 말도 못 했다.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스텔라를 궁지에 몰아넣어 놓고 이제는 왜 입을 닫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입을 열면 쏘아붙이고, 닫으면 또 왜 닫느냐고 화를 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팔짱을 꼈다.
“그럼 내가 물어볼 테니까 대답만 해. 네, 아니오로.”
스텔라가 눈을 들었다.
“다시는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네.”
“네 상관의 지시를 최우선으로 따르겠습니다.”
“네.”
“상관에게 보고 없이 독단 행동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잠깐의 침묵.
“…네.”
그제야 서이현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원했던 모범답안을 스텔라는 완벽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말대꾸하던 스텔라보다 지금의 스텔라가 훨씬 멀게 느껴졌다.
대위와 소위.
상관과 부하.
딱 그만큼의 거리만 남은 것 같았다.
그 거리가 본래 옳은 것이었는데.
왜 이렇게 싫은지 알 수가 없었다.
서이현은 결국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켜고 깊게 빨았다.
연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가 빠져나갔다. 그래도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잠시 후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스텔라 쪽으로 내밀었다.
“물어.”
스텔라가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벌렸다. 필터가 입술 사이에 물렸다. 서이현은 라이터 불을 붙였다. 바람에 불꽃이 흔들리자 자연스럽게 손으로 감쌌다. 작은 주황빛 안에서 스텔라의 얼굴이 잠깐 선명해졌다.
흙 묻은 뺨.
지친 눈.
그래도 멀쩡한 얼굴.
서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오래 바라봤다.
“깊이 들이마셔.”
스텔라가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작게 얼굴을 찌푸렸다.
“…씁니다.”
그 말에 처음으로 서이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알아.”
둘 사이로 흰 연기가 흘렀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싸워놓고도 아무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스텔라는 여전히 상처받아 있었다. 서이현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사람들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했다는 것도, 상관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너무 많은 걸 쏟아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았다.
그렇다고 사과할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고 하는 순간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걱정했다는 것.
무서웠다는 것.
스텔라가 나오지 않는 몇 분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들을 인정하고 나면 더 이상 단순한 상관과 부하라고 우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이현은 담배만 피웠다. 스텔라는 옆에서 조용히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조금 이해했다. 이 사람의 걱정은 평범한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았다. 다치지 말라고 하지 않고 명령을 지키라고 했다.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고 팔을 내밀라고 했다. 아팠냐고 묻지 않고 그것도 보고라고 했다. 상처가 난 것이 싫어서 화를 냈으면서 정작 가장 상처 주는 말을 골라 했다. 좋은 방식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전히 속상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서이현의 친절은 완성된 보석처럼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다. 돌덩이 같은 무뚝뚝함 안에 파묻혀, 직접 캐내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는 원석에 가까웠다. 스텔라가 담배를 한 번 더 빨았다.
“…넵.”
서이현은 옆눈으로 그녀를 봤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오늘은 놀랐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아니, 그런 말은 이미 너무 많이 했다.
결국 그가 고른 것은 전혀 상관없는 문장이었다.
“민호 학원 끝나면 여섯 시야.”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서이현은 괜히 담배재를 털며 먼 곳을 봤다.
“늦지 마.”
그게 전부였다.
오늘 저녁 약속은 취소하지 않는다는 말.
조금 전 그렇게 싸웠어도 네가 빠진 자리를 만들 생각은 없다는 말.
여전히 화가 났고, 여전히 서운했고,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서이현의 오늘 저녁에는 변함없이 정스텔라가 있었다.
